[소년중앙] 판타지 속 판타지를 찾아서 50화. 슬라임

중앙일보

입력 2022.03.07 07:00

업데이트 2022.03.31 21:45

추한 괴물에서 사랑받는 캐릭터로…슬라임의 전생

어느 날, 거리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난폭한 사람의 칼에 찔려 숨을 거둔 것이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고를 당한 주인공이 다른 세계에서 환생한 거죠. 문제는 그가 환생한 몸이 인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몸에 팔다리는 고사하고, 몸통과 머리도 구분되지 않았죠. 눈‧코‧입 어느 것도 없었기에 말을 하거나, 숨을 쉬기는커녕 주변을 볼 수도 없었어요. 제대로 된 형태조차 없었습니다. 젤리 같은 느낌에 흐물거리는 점액질의 몸… 주인공은 바로 슬라임(Slime)이라 불리는 괴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검과 마법의 판타지 세계에서 기묘한 모양으로 환생한 주인공, 과연 주인공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일본의 라이트 노벨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이하 전생슬)』는 우리 세계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려 죽은 주인공이 슬라임이라는 기묘한 괴물로 다시 태어나서 겪는 이야기입니다. 다채롭고 특이한 설정이 많은 라이트 노벨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은 작품으로, 원작 소설뿐 아니라 만화책 등 관련 책을 모두 포함하면 3000만 부가 넘게 팔리기도 했죠. ‘전생슬’에서 주인공은 슬라임이라는 괴물로 다시 태어납니다. 중간부터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있게 되지만 그 본질은 점액질 괴물, 일본 판타지에선 보통 가장 약한 괴물로 알려진 존재죠. ‘드래곤 퀘스트’를 비롯한 많은 게임에서 슬라임은 고작해야 1 정도 피해밖엔 입히지 못하는 최약체 적으로 등장하니까요.

2021년 개봉한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에 다시 등장한 먹깨비. 슬라임 괴물이지만 고스트버스터즈의 마스코트 격으로 사랑받는 캐릭터다.

2021년 개봉한 ‘고스트버스터즈 라이즈’에 다시 등장한 먹깨비. 슬라임 괴물이지만 고스트버스터즈의 마스코트 격으로 사랑받는 캐릭터다.

하지만 ‘슬라임’이 본래부터 약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슬라임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점액질 괴물은 크툴루 신화로 유명한 H P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여기에 등장한 종족 쇼거스는 신과 같은 존재가 만든 도구였지만, 반대로 그들을 멸망시켰다고 여겨져요. ‘블롭’이란 영화에 등장한 점액질 괴물 블롭은 추락한 유성에서 흘러나와 달라붙은 모든 존재를 녹여서 잡아먹으며 몸을 키우죠. 칼도 총도 통하지 않고요.

슬라임이란 이름으로는 1953년 미국의 한 판타지 소설에서 처음 나옵니다. 여기서 슬라임은 처음 바다가 태어날 때 생겨난 괴물로, 바닷속 깊은 곳에 살고 있으며 가까이 다가간 모든 것을 잡아먹죠. 무한한 허기로 괴로워하며, 모든 것을 녹여서 삼켜버리는 슬라임은 정말로 무시무시하기 이를 데 없어요. 슬라임이나 그와 비슷한 점액질 괴물은 이야기를 바꿔가며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존재로 등장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슬라임은 점액질이며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꿀 수 있어요. 칼로 베어봐야 둘로 갈라질 뿐, 금방 다시 붙어버리겠죠. 게다가 강력한 독이나 산성 물질로 이루어져 달라붙은 모든 것을 녹여버리죠. 사람은 물론이고 강철조차 오래 버티지 못해요.

추한 괴물이었던 슬라임이 주인공이 된 게임 ‘슬라임 모리모리 드래곤퀘스트’. 이 모든 건 귀여운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됐다.

추한 괴물이었던 슬라임이 주인공이 된 게임 ‘슬라임 모리모리 드래곤퀘스트’. 이 모든 건 귀여운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됐다.

무시무시한 슬라임은 미국 게임 ‘위저드리’에서 그 처지가 바뀌고 맙니다. 여기서 등장한 슬라임은 공격력도 약하고, 가볍게 때리기만 해도 쓰러지는 약한 적이었거든요. 물론, 점액질의 몸이라 끔찍하게 생겼다는 점은 변함이 없죠. 영화 ‘고스트버스터즈’에서 등장한 슬라임 모양 괴물, 먹깨비(슬라이머)는 약간 귀여운 느낌도 있지만 말이죠. 이후 일본 게임 ‘드래곤 퀘스트’에서 슬라임의 상황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드래곤 퀘스트’를 만든 개발자 호리이 유지는 ‘위저드리’를 참고로 슬라임 괴물을 넣기로 했습니다. 당연히 매우 약하고, 추한 점액질 모양으로 생각해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죠. 이게 웬일인가요? 완성된 그림은 녹색의 점액질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받은 그림에는 하늘색 투명한 젤리에 동그란 눈과 입이 달린, 동그란 물방울 모양의 앙증맞은 생명체가 있었던 것이죠. 호리이 유지는 이 디자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예정대로 최초의, 가장 약한 적이 됐죠. 그리고 디자인을 바꾸며 계속 등장시킵니다. 녹색이나 주황색, 빨강색처럼 다양한 색상은 물론이고, 하늘을 날거나 소라껍질을 뒤집어쓴 슬라임, 심지어 금속으로 된 슬라임도 있었죠. 여기에 입도 있으니, 당연히 말도 합니다.

어느새 슬라임은 ‘드래곤 퀘스트’를 대표하는 마스코트 캐릭터가 됩니다. 인형이나 장난감은 물론이고 슬라임이 주인공인 게임까지 나오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죠. 평범한 사람이 슬라임으로 환생한 이야기 ‘전생슬’에서 주인공은 슬라임 모양으로 매우 귀여움을 받습니다. 악당들은 그를 ‘고작 슬라임 주제에’라며 비웃지만, 사실은 무진장 세고 강력하죠. 점액질 괴물이니 무엇이든 삼켜서 흡수할 수 있고, 그만큼 더 능력이 높아지는 설정이니까요. ‘전생슬’의 슬라임은 능력으로 보면 쇼거스나 블롭 같은 무시무시한 괴물입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드래곤 퀘스트’의 그것처럼 귀엽고 앙증맞게 생겼죠. 이제까지 등장한 다양한 슬라임의 장점을 모두 뒤섞은 매력적인 존재로서 인기를 끄는 겁니다. 그 모든 건 한 만화가가 추한 점액질 괴물을 귀여운 캐릭터로 그려내면서 시작되었죠. 발상의 전환이 추한 괴물을 인기 캐릭터로 바꾼 이야기. 재밌지 않나요?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전홍식 SF&판타지도서관장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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