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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통째 씹히는 멍게, 도다리보다 더 귀한 쑥…통영은 맛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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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통영 추봉도 곡룡포 언덕에서 해쑥을 뜯는 할매들. 2월 중순이면 통영의 섬 곳곳의 빈 땅이 쑥의 초록빛으로 가득 찬다. 백종현 기자

경남 통영 추봉도 곡룡포 언덕에서 해쑥을 뜯는 할매들. 2월 중순이면 통영의 섬 곳곳의 빈 땅이 쑥의 초록빛으로 가득 찬다. 백종현 기자

봄은 남쪽 먼바다로부터 불어온다. 지금 경남 통영 앞바다의 장사도는 동백꽃의 붉은빛이, 추봉도는 해쑥의 초록빛이 섬 전역을 물들이고 있다. 통영항 서호시장과 활어시장에 봄것들이 좌판 가득 누워 있고, 미륵산 자락에는 변산바람꽃이 언 땅을 비집고 나와 말간 얼굴을 내민다. 통영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어느새 봄이었다.

봄기운 품은 맛

충무교 남단 해원횟집에서 맛본 도다리쑥국.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해쑥이 들어가야 진정한 도다리쑥국이다. 백종현 기자

충무교 남단 해원횟집에서 맛본 도다리쑥국.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해쑥이 들어가야 진정한 도다리쑥국이다. 백종현 기자

계절이 바뀌면 밥상 풍경도 달라진다. 통영의 겨울이 굴의 것이었다면, 봄의 주인공은 단연 도다리쑥국이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이 법칙처럼 굳어졌지만, 봄 도다리(문치가자미)가 최고라는 건 실은 미신 또는 교묘한 상술에 가깝다. 이맘때 잡힌 도다리는 산란 직후여서 살도 적고, 식감도 무른 편이다.

도다리쑥국을 완전하게 하는 건 사실 쑥이다.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해쑥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2월 중순이면 한산도‧소매물도‧욕지도 등 통영 섬 곳곳에서 해쑥이 고개를 내민다. 비닐하우스에서 큰 쑥이나 냉동 쑥은 향과 맛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한산도와 이웃한 추봉도는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를 두었던 외진 땅이다. 섬에 드니 쑥이 지천이었다. 마침 섬 끄트머리 곡룡포 들에서 해쑥 뜯는 풍경을 엿봤다. 쑥밭에 마주 앉은 정두이(91)‧정모악(85) 할머니의 쑥 자랑이 이어졌다.

“이 여린 놈이 얼매나 향긋한지 모른다꼬.” “겨우내 바닷바람 맞으매 지가 알아서 쑥쑥 큰다.” “1㎏ 뜯으면 3만원은 벌지.”

이맘때면 통영항 주변 식당에서 도다리쑥국을 내는데, 조리법이 조금씩 다르다. 맹물에 소금만 넣어 맑게 끓이기도 하고, 멸치 육수나 간장도 활용한다. 충무교 남단 22년 내력의 ‘해원횟집’에서 도다리쑥국(2만원)을 맛봤다. 된장을 살짝 푼 물에 토막 낸 도다리를 넣어 푹 끓인 다음, 한산도 해쑥을 얹어 냈다. 뜨끈한 김에 쑥 향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감격스러운 봄의 첫 끼였다.

멍게 수확도 3월부터 시작된다. 고깃배가 바다에서 잔뜩 살을 찌운 멍게을 매달고 항구로 돌아온다. 사진 통영멍게수협

멍게 수확도 3월부터 시작된다. 고깃배가 바다에서 잔뜩 살을 찌운 멍게을 매달고 항구로 돌아온다. 사진 통영멍게수협

바다의 꽃이라 불리는 멍게도 이맘때 수확을 시작한다. 통영 산양읍 영운항이 전국 최대 멍게 집산지다. 고깃배들이 시뻘건 멍게를 주렁주렁 매달고 항구로 들어오는 봄의 장관이 6월까지 이어진다. 통영 멍게는 대개 굴처럼 수하식(垂下式)으로 양식한다. 밧줄에 유생을 다닥다닥 붙인 다음 바닷물 아래 매달아 키운다. 주먹만 한 멍게로 자라려면 족히 2~3년이 필요하다. 통영활어시장의 멍게 아지매에게 배운 ‘좋은 멍게를 고르는 비법’은 이렇다.

“몸집이 크고, 붉은색이 선명하고, 뿔이 고루 발달한 멍게를 골라라”

통영항 뒤편으로 멍게를 다루는 식당과 해산물 가게가 널려 있다. 중앙시장 인근 ‘원조밀물식당’에서 멍게비빔밥(1만원)을 시켰다. 별다른 양념 없이 저온 숙성한 멍게를 참기름‧깨‧김만 곁들여 비벼 먹는데, 비린내 없이 감칠맛이 대단했다. 도다리쑥국이 겨울의 피로를 살포시 달래는 음식이라면, 멍게비빔밥은 봄을 통째로 씹는 맛이었다. 멍게 전골(3만원)은 이곳에서 난생처음 먹어봤다. 팔팔 끓인 멍게는 쫄깃쫄깃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것이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통영 원조밀물식당의 멍게비빔밥과 멍게전골. 저온숙성한 멍게는 초장이나 간장을 섞지 않아도 감칠맛을 낸다. 백종현 기자

통영 원조밀물식당의 멍게비빔밥과 멍게전골. 저온숙성한 멍게는 초장이나 간장을 섞지 않아도 감칠맛을 낸다. 백종현 기자

미륵산의 재발견

통영 미륵산 자락 용화사 숲에서 만난 변산바람꽃. 백종현 기자

통영 미륵산 자락 용화사 숲에서 만난 변산바람꽃. 백종현 기자

통영에서 제일가는 인기 관광지는 누가 뭐래도 통영케이블카다. 2008년 개장해 지난해 10월 누적 탑승객이 1500만명을 넘겼다. 국민의 4분의 1이 케이블카를 타고 한려해상을 조망하고 내려간 셈이다.

케이블카를 타면 미륵산(461m) 8부 능선(380m)까지 10분 만에 오를 수 있지만, 봄날에는 두 발로 거슬러 오르는 산행이 더 즐겁다. 헐거워진 흙길을 밟는 재미도 크고, 숲이 내뱉는 봄 내음도 원 없이 마실 수 있다. 미륵산 북쪽 기슭의 천년고찰 용화사를 기점으로 부속 암자인 도솔암과 미륵치를 거쳐 정상으로 향하는 약 2㎞ 산행 코스가 일반적이다. 1시간이면 거뜬히 오를 수 있다.

케이블카 타고 미륵산의 정수리만 밟아서는 알 수 없는 사실 하나. 미륵산 기슭에 수많은 야생화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통영 미륵산의 들꽃』을 쓴 김영환(66) 작가와 함께 산길에 올랐다. 김 작가는 10년 가까이 일주일에 두세 번씩 미륵산을 오르내리며 야생화를 담고 있다. 봄에서 가을까지 300종이 넘는 야생화가 피고 지는데, 첫 번째 봄 손님이 이맘때 피는 변산바람꽃이란다. 4~5월이면 자줏빛의 얼레지가 산을 장악하고, 원추리(6~7월)‧참나리(7~8월)‧구절초(9~11월) 등이 이어달리기를 한다.

도솔암 뒤편 숲에는 노루귀가 많다. 사진 김영환 제공

도솔암 뒤편 숲에는 노루귀가 많다. 사진 김영환 제공

납작 허리를 굽히고 용화사 뒤편 산비탈을 오르길 10여 분. 바위틈에 삼삼오오 무리 지어 핀 변산바람꽃을 발견했다. 김 작가는 “겨울 가뭄 때문에 걱정했는데 여린 것이 용케도 꽃을 피웠다”며 대견해 했다. 2~3월에 잠깐 고개를 내민다는 변산바람꽃은 그야말로 자잘한 들꽃이었다. 키는 10㎝ 남짓으로, 좁쌀만 한 꽃잎과 수술을 하얀색의 꽃받침이 감싸고 있었다. 무릎을 꿇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짝 엎드려야 얼굴이 보였다. 보면 볼수록 앙증맞고 고운 얼굴이었다.

이른 봄 꽃샘추위를 뚫고 피어나는 노루귀도 변산바람꽃‧복수초와 함께 등산객이 가장 사랑하는 봄 야생화다. 노루귀는 도솔암 뒤편의 숲에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솜털로 감싼 가녀린 몸 위에서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렸다.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붐비는 케이블카와 달리 미륵산 산길에는 인적이 거의 없었다. 정상에서 굽은 허리를 펴자, 한려해상의 섬들과 통영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미륵산 정상의 전망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다. 통영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과 통영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용화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거리. 케이블카 전망대에서는 15분이 걸린다. 백종현 기자

미륵산 정상의 전망은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다. 통영 앞바다의 수많은 섬들과 통영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용화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거리. 케이블카 전망대에서는 15분이 걸린다. 백종현 기자

동백섬 붉은 융단  

장사도 동백터널. 2013년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등장해 전국구 명물이 된 장소다. 좁은 길을 따라 동백나무가 150m가량 이어진다. 장사도 동백은 3월 중하순이 절정이다. 백종현 기자

장사도 동백터널. 2013년 인기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 등장해 전국구 명물이 된 장소다. 좁은 길을 따라 동백나무가 150m가량 이어진다. 장사도 동백은 3월 중하순이 절정이다. 백종현 기자

봄날의 통영은 선명한 붉은색이다.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충렬사 사당 옆에도, 달아공원 전망대 밑에도, 한산대첩기념비를 찾아가는 한산도 문어포마을 언덕길에도 동백꽃이 촘촘히 매달린다. 남해안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인 산양일주도로는 가로수를 동백나무로 둔 덕에 봄날 가장 큰 사치를 누린다.

570개가 넘는다는 통영의 섬 가운데 남동쪽의 외딴섬 장사도에 들어갔다. 동백나무가 10만 그루 가까이 뿌리내린 섬이다. 1월부터 애기동백과 참동백이 차례로 꽃을 피운다. 3월 중·하순이 절정이다. 뱀을 닮아 장사도(長蛇島, 동서로는 400m, 남북으로는 1.9㎞ 길이다)라지만, 봄날엔 동백섬이란 애칭이 더 친숙하다. ‘장사도 해상공원 카멜리아’가 정식 명칭으로, 거제도의 이름난 외도 보타니아처럼 섬 전체를 생태공원으로 꾸민 관광의 섬이다. 7년간 공사를 거쳐 2012년 문을 열었다.

장사도에 가려면 유람선을 타야 한다. 행정상 통영에 묶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거제도가 더 가깝다. 거제도 대포항이나 근포항에서 유람선을 타면 10여 분 만에 섬에 닿는다. 통영유람선터미널에선 뱃길로 40분이 걸리지만, 장점도 있다. 유람선이 한산도‧추봉도‧죽도‧용초도 등 한려해상의 주요 섬을 훑고 지나기 때문이다. 통영유람선 기준 2만8500원(장사도 입장료 포함)이 든다.

“한산도 앞바다 저 수많은 부표 아래에 굴과 멍게가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여인이 곱게 치마를 입고 누운 모습이 보이나요? 비진도의 다른 이름이 그래서 미인도입니다.”

선장의 정겨운 해설은 장사도까지 이어졌다. 장사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대략 2시간. 장사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동백터널’부터 찾아갔다. 키가 3m 가까이 되는 동백나무가 좁은 산책길을 따라 150m가량 도열해 있는데, 길바닥에도 빼곡하게 동백꽃이 떨어져 있었다. 붉은 융단을 걷는 이 모두 꽃을 뭉개버릴까 싶어 살금살금 터널을 지나갔다.

장사도 동백터널은 2014년 최고의 히트작이었던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로 알려진 덕에 한동안 중국에까지 명성이 닿았더랬다. 화려한 분재 작품이 모인 옛 장사도 분교, 야외공연장과 예술가의 집 등 천송이(전지현)와 도민준(김수현)이 다녀간 명소가 지금도 남아 있다.

코로나 사태 이후 단체 여행객이 사라지면서 섬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인증사진을 찍느라 길게 줄을 서던 풍경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2014년 봄에는 하루 7000명이 들기도 했지만, 요즘엔 500명 이하로 드는 날이 더 많단다. 덕분에 섬에서의 2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동백터널에서 수백장의 봄 풍경을 담고 뭍으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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