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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세계경제전망

러 군사력과 서방의 경제 제재는 ‘창과 방패의 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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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미·중·러 패권 다툼의 경제학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파괴된 러시아 탱크. [연합뉴스]

우크라이나군에 의해 파괴된 러시아 탱크. [연합뉴스]

미국이 패권을 계속 지킬 수 있을까. 더는 의문 거리도 아니다. 중국의 도전에 이어 러시아까지 미국의 힘을 시험하고 나서는 상황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단단히 준비해왔다. 목표는 미국의 경제 패권 탈피다. 러시아는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동안 외환보유액을 쌓아 올리고 달러 사용을 최소화해왔다. 중국도 판박이다. 역시 외환보유액을 늘리면서도 미 국채 보유를 급격히 줄여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군사력과 경제력은 창과 방패가 되고 있다. 러시아의 군사력은 과연 군사 충돌을 피하려는 서방의 경제 제재를 뚫을 수 있을까. 전 세계가 창과 방패의 대결에 휘말리고 있다.

러시아, 대비했지만 제재받고 흔들
전방위적 경제제재가 전쟁 억지력
미 첨단기술 통제·강화 한층 가속
한국 초격차 기술력 가져야 생존

1. 푸틴이 믿었던 배경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배경에도 경제의 논리가 숨어 있다. 전쟁의 빌미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의 동진(東進)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 서부는 벨라루스 정도를 빼면 나토에 둘러싸이는 형국이 된다. 미국이 주축인 나토가 회원국을 넓히며 다가와도 그간 러시아는 내놓고 반발하지 못했다. 쇠락한 경제력 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러시아가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은 그 이유를 러시아의 경제력 강화에서 찾았다. 러시아의 경제력은 표면적으로는 대단할 게 없다. 2021년 국내총생산(GDP)은 1조6475억 달러로 한국(1조8238억 달러)의 뒤를 이어 세계 11위다. 국가 덩치만 클 뿐이지 종이호랑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NYT는 ‘푸틴이 미국의 제재를 버틸 만한 경제력을 키웠다’고 강조한다.

전 세계로 번지는 경제전쟁.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 세계로 번지는 경제전쟁.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푸틴은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한 대가로 미국이 앞장선 경제 제재로 혹독한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사회에서도 몸을 낮췄다. 하지만 최근 호전적 태도로 돌변한 배경은 서방의 경제 제재를 버틸 만한 체력 비축이다. 핵심 대책은 달러 의존도 탈피다. 러시아는 1월 외환보유액이 6306억 달러에 달해 외환보유액 세계 5위로 떠올랐다. 8위 한국(4631억 달러)보다 1675억 달러 더 많다.

NYT는 “그야말로 러시아가 경제 제재의 면역력을 강화했다”고 분석했다. 미국이 북한을 제재할 수단이 마땅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경제적 연결고리다. 직접 제재하지 못하면 간접 제재(세컨더리 보이콧)라도 해야 하지만 글로벌 경제와 담쌓고 사는 북한을 압박할 수단은 마땅치 않다. 이와 달리 러시아는 글로벌 경제 체제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애플·구글 등 미국 기업은 물론 삼성전자·현대자동차 등 한국 기업에 러시아는 놓치기 어려운 시장이고, 러시아는 가스를 비롯해 천연자원 수출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결국 크림반도 합병사태 이후 8년간 구축한 경제 방어망이라고 NYT는 분석했다. 외환보유액을 최대한 쌓아놓는 동시에 대외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달러 사용을 최소화해왔기 때문이다. 경제제재를 받아도 버틸 수 있을 힘을 확보한 셈이다. 그러나 상황은 푸틴 대통령의 계산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전방위 공세 펴는 서방

지난달 24일 침공이 시작되자 서방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유럽 정세에 밝은 서방 언론조차 비관론이 앞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7개 회원국이 유럽연합(EU)의 깃발 아래 얼마나 힘을 모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고 분석했다. 독일을 비롯해 유럽 전역이 탈원전 바람을 타고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를 높여왔기 때문이다.

제재 강도를 높일수록 유럽 각국의 경제적 고통도 커진다. 더구나 유럽 경제는 그 고통을 장기적으로 버틸 여력이 없다. FT는 “온갖 규제가 유럽 기업의 혁신을 질식시키면서 유럽 경제는 변변한 플랫폼 하나 갖지 못할 만큼 힘이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유력 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제재가 장기화할수록 서방 역시 버티기 어렵다”고 전망한 이유다.

러시아의 외환보유액.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러시아의 외환보유액.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워싱턴포스트(WP)는 “그 출발점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화상 통화였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26일부터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국·독일 등 주요국 정상과 잇따라 화상통화를 했다. 그때 “우크라이나의 평화가 곧 유럽의 평화”라며 항전 의지를 밝힌 게 유럽 정상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주저하던 러시아 은행 제재와 스위프트(SWIFT) 퇴출에 뜻이 모였다.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스위프트가 끊어지면 러시아의 국내총생산(GDP)이 5% 하락할 것이란 분석도 나왔다”고 보도했다. 경제 제재가 본격화하자 러시아 경제는 바로 흔들리고 있다. 증권거래소가 폐쇄되고, 루블화는 30% 폭락했다. 러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7.5%에서 20%로 올려 루블화 방어에 나섰지만, 현금 인출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등 전략 물자 통제가 가세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이 경제전쟁의 결과를 알 수 없다. 스위프트 차단의 효과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국제 사회의 은행 간 금융 커뮤니케이션(SWIFT)’의 의미처럼 이 시스템을 이용하지 못한다고 해서 금융거래 자체가 막히지는 않는다. 이메일·전화 등 재래식으로 금융거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러시아는 2020년, 중국은 2015년에 이미 미국의 제재에 대비해 대안을 마련했다. 스위프트가 차단돼도 중·러 간 무역결제에는 영향이 없도록 마련한 안전장치다. 중국은 당장 러시아의 외환 결제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자칫 중·러가 스위프트의 위력을 약화할 수 있다.

결국 관건은 우크라이나의 전황이다. 우크라이나가 버틸수록 푸틴은 국내 경제 패닉 때문에 타격을 입게 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럴수록 핵 위협을 비롯해 러시아의 전쟁판 키우기도 커질 수 있다. 대서양회의 지경학센터 선임연구원 브라이언 오툴은 NYT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수세에 몰리면 사이버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며 “미 우방국 은행은 철저한 대비에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3. 첨단산업 강화하는 미국

미 하원은 1월 4일 ‘미국경쟁법’을 가결했다.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분야에 미 정부가 보조금을 지원해 중국의 추격을 뿌리친다는 신호탄이다. 그야말로 총성 없는 미·중 경제 전쟁이 격화하고 있다.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달러 대비 루블화 환율 추이.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이 법안은 지난해 6월 상원에서 통과한 관련 법안과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국가 보조금 지원은 시장경제 원리를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공화당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대체로 초당적인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펠로시 하원의장은 “제조업과 혁신으로 미국의 초격차를 유지해 어느 나라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2900쪽이 넘는 법안에는 정부가 기업 생산과 연구개발에 개입할 수 있는 분야가 명시됐다. 핵심은 520억 달러가 지원되는 반도체 산업 지원이다. 대만의 TSMC, 삼성전자·인텔에도 자금이 지원된다.

그동안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시장원리를 거스른다며 민간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문제 삼아온 미국의 입장 변화는 절박감을 드러낸다. 지금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미국이 이끌어온 국제질서와 첨단기술 패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레이 달레오 유라시아그룹 대표는 2030년 무렵의 세계 질서를 전망한 니혼게이자이의 ‘2030 게임 체인지’ 인터뷰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세계의 리더가 없는 G 제로 상태가 될 것인데, 빅테크와 인공지능(AI)의 위력이 커지면서 국가로서 미국의 영향력은 더 약화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미 정부 역시 이런 변화의 배경을 숨기지 않는다. 보조금 제도를 담당하는 레이먼드 상무장관은 “최첨단 반도체 생산을 대만 등 해외에 의존하는 건 안전보장 차원에서 위험하다”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는 “중국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대만에 대한 무력통일 의욕을 드러내는 만큼 유사 사태에 대비해 미국 내 생산이 본격화하고 있다”고 풀이했다. 일본과 유럽연합 역시 전략 물자의 자국 내 생산을 강화하는 법안을 줄줄이 만들고 있다. 미·중·러의 패권 경쟁이 기존 글로벌 공급망을 사실상 해체하고 있다. 초격차 기술력 등 만반의 대비가 있어야 생존이 가능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