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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회식때 샐러드만...'비건' 말 못하는 막내, 함께하는 법

중앙일보

입력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막내 직원 김모(23)씨. 김씨의 직장 선후배 대부분은 그가 채식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까운 동료 외에는 자신이 채식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서다. 김씨는 “선배들과 함께 식사할 때 이런저런 조언을 듣는데, 내가 채식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자리가 줄어들까 봐 말을 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샤이 채식인’이라 부르는 김씨는 2년여 전부터 채식을 지향해 왔다.

유명 제조 대기업에서 일하는 A(25)씨는 회사에서 자신이 '페스코'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페스코란 고기는 먹지 않지만, 달걀과 유제품, 해산물을 먹는 채식 단계를 뜻한다. 자칫 ‘까다롭게 구는 요즘 여자애’로 인식될까 걱정돼서다. A씨는 “다이어트 중이라고 거짓말하고 혼자 샐러드를 먹는 것도 한계가 있다. 회식 때 예약한 한우 식당에 가서 채소만 골라 먹기도 여러 번”이라며 “차라리 편식이라면 몰라도 채식을 한다고 하면 젠체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하소연했다.

"까다롭다" 시선에 전전긍긍…숨어있는 ‘막내 채식인’ 

환경과 동물권 문제가 주요 관심사인 2030을 중심으로 채식주의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한국채식연합은 2022년 기준 국내 채식인구를 전체 인구의 3~4% 정도인 약 150만~200만명으로 추정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2~3배 늘어난 수치다. 한국채식연합은 이 중 100만명은 MZ세대라고 추정한다. MZ세대가 회사원이 되면서 '채식주의 직장인'도 늘어나고 있지만, 대부분은 사회 초년생이라 회사 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회사원 정모씨는 2년 반 동안 일한 직장을 떠나던 송별회 날 팀원들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식당에서 ‘비건 회식’을 했다. 막내로서 회식장소 선정을 해 왔던 정씨는 마지막 소원으로 채식 옵션이 있는 식당을 골랐다고 한다. 그는 “채식을 시작한 후 식당 선정과 예약이 큰 스트레스였다”며 "송별회 날만큼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 싶어 고민하다 선배들에게 용기를 내 비건 회식을 권유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페스코 채식인인 A씨가 즐겨 방문하는 채식 음식점들에서 먹은 음식들 [제공 A씨]

페스코 채식인인 A씨가 즐겨 방문하는 채식 음식점들에서 먹은 음식들 [제공 A씨]

 회사 입성한 2030 채식주의자…함께하려면 

이처럼 눈치를 보며 숨어 있는 ‘직장인 채식인’들과 함께하려면 채식 단계와 개개인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같은 채식인이라도 유제품·달걀·벌꿀 등 동물성 음식을 전혀 섭취하지 않는 ‘비건’이 있는가 하면 앞서 언급한 A씨처럼 고기를 먹지 않지만, 해산물은 먹는 ‘페스코’도 있기 때문이다.

몽골에서 온 15년 차 비건인 대학원생 오란치멕(37)은 “교수님이 챙겨주려는 마음에 빵이나 라떼, 샐러드 등을 사 주시는데 우유나 계란이 들어있어 난처한 경우가 많다”며 “못 먹는 음식이라고 얘기했다가 분위기를 깨기 싫어 같이 어울려서 먹는 척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비건이 됐다는 유주희(36)씨는 “회사에서 함께 식사할 때 채식 선택이 가능한 식당도 고려해주면 좋겠다”며 “삼겹살집은 쌈 채소라도 나오는데 횟집은 정말 먹을 수 있는 게 없어 회식이 괴롭다”고 했다. 반면 페스코인 A씨의 경우 회식 장소로 횟집이나 해물찜 가게가 삼겹살집보다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더 넓다고 한다.

유주희(36)씨가 점심 회식에 회식에 먹은 곤드레밥과 녹두전 [제공 유주희 씨]

유주희(36)씨가 점심 회식에 회식에 먹은 곤드레밥과 녹두전 [제공 유주희 씨]

직장도 변화…‘채식’ 바람 부는 사무실

채식 인구가 늘면서 기업들에서도 채식주의자를 위한 구내식당 메뉴를 마련하는 등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단체급식업체 아워홈은 채식 문화 확산에 따라 지난해 1월 고객사 구내식당에 채식 맞춤형 식단과 식물성 대체육을 활용한 메뉴를 내놓았다. 삼성전자DS부문은 지난해 2월 채식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한 뒤 사내식당에 '비건 팩'과 '락토 오보팩' 등 채식 메뉴를 도입했다. 이밖에 한 공기업 사내식당에서도 채식으로 식단을 구성한 ‘채식의 날’을 운영하고 있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대표는 “과거엔 중장년층이 건강을 위해 채식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엔 2030 MZ세대가 채식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기후위기, 가치소비, 동물권에 대한 관심 때문”이라며 “'다름'이 자연스러운 것인 만큼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문화가 더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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