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신발은 누가 만들었을까? 이토록 정겨운 짚신 네 켤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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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인, 티와 안잔, 짚풀 신발과 사운드 설치, 2021.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 티와 안잔, 짚풀 신발과 사운드 설치, 2021. [사진 PKM갤러리]

아담한 전시장 안에 사람의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커다란 짚신 네 켤레가 놓여 있다. 크기도 제각각이다. 모두 어딘가를 향해 함께 걷다가 신발만 남겨두고 일제히 사라진 듯하다. 그들은 누구이고, 다 어디로 갔을까.  ·

PKM갤러리, 홍영인 개인전 #인간과 동·식물 수평공동체 #대규모 자수 작품 등 선보여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 'We Where'에서 홍영인(50) 작가가 선보인 설치 작품이다. 제목은 '티(Thi)와 안잔(Anjan)', 티는 동물원에서 살다 숨진 할머니 코끼리의 이름이고 안잔은 티의 손녀 코끼리다. 작가가 영국 체스터 동물원에서 자주 관찰하던 코끼리들이 이 신발의 주인이다.

신발은 작가가 국내 짚풀공예 명인 이충경, 박연화의 손을 빌려 만들었고, 아프리카 삼림 등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소리는 일테트로닉 뮤지션 마일즈 오토, 색소폰 연주자 앤드루 닐 헤이스와 협업해 만들었다. 네 켤레의 신발, 그리고 전시장에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로 다가오는 코끼리 가족의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

영국 브리스톨에 기반을 두고 작업해온 홍영인은 이번 전시에서 코끼리 신발을 포함한 신작 8점과 드로잉 자수 등 총 26점을 갤러리 전관에서 선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9' 전에서 '새'를 소재로 인간과 동물의 위계에 대해 질문하는 작품을 선보였던 그는 이번 전시에서 더욱 다채로워진 소재와 기법으로 '공동체'라는 자신의 화두를 다룬다. 인간과 동물. 식물 등 모든 생명체가 공존하고 평등하게 관계 맺는 수평적 공동체다.

홍영인은 '공동체'라는 화두에 대한 탐구를 드로잉과 바느질, 펠트 조각, 악보, 음악 퍼포먼스로 펼쳐놓는다. 고릴라와 원숭이를 대형 자수작업으로 완성한 '두 세계 사이 한 개의 문'(2021년)이란 작품도 그중 하나다.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라는 사당 그림에서 착안한 이 작품에선 사당 곳곳에 고릴라와 원숭이가 자유롭게 앉아 있다. 공경받는 조상 대신 고릴라와 원숭이가 앉아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다.

홍영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전경.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 전경.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 A colorful Waterfall and the Stars, 2021. 1970~80년대 여성 직공들의 이야기를 담았다.[사진 PKM]

홍영인, A colorful Waterfall and the Stars, 2021. 1970~80년대 여성 직공들의 이야기를 담았다.[사진 PKM]

 홍영인의 'Prayer' 연작 중 하나. 드로잉 자수다. 한국 민중 운동 보도사진 한 장면에서 추출한 추상적인 아웃라인을 바느질 선으로 표현했다.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의 'Prayer' 연작 중 하나. 드로잉 자수다. 한국 민중 운동 보도사진 한 장면에서 추출한 추상적인 아웃라인을 바느질 선으로 표현했다.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의 'Prayer' 연작 중 하나. 드로잉 자수다. [사진 PKM갤러리]

홍영인의 'Prayer' 연작 중 하나. 드로잉 자수다. [사진 PKM갤러리]

작가가 1970~80년대 한국 섬유공장에서 일한 여성 직공들을 생각하며 만든 텍스타일 콜라주 작업도 흥미롭다. 작가는 이를 위해 과거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영어로 번역한 후 단어들을 발췌했고, 천 조각으로 만든 후 다시 이어붙였다. 이름 대신 번호로 불렸던 여공들의 삶이, 노조 활동에 참여하며 '두렵지만 세상이 변할 것만 같았다'고 말한 그들의 이야기가 여기 담겼다. 작가가 자신만의 방법으로 시도한 '역사 새로 쓰기'다.

한국 민주화 운동 보도사진에서 추출한 실루엣으로 악보를 만든 '사진-악보'작업도 있다. 과거의 시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의 한 현장의 이미지를 추상적인 선으로 뽑아내고, 이것을 악보로 만들어 음악으로 연주한다는 발상 자체가 기발하다. 역사의 한 장면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공감각적으로 전환한 것이다.

우리가 많이 보아오던 회화나 조각이 아닌 홍영인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보다 적극적인 참여와 상상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한발짝 더 다가가 보면 작가가 자신만의 독특한 재료와 일관된 주제로 펼쳐놓은 따뜻하고, 섬세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현재 영국 바스대 교수로 재직 중인 홍영인은 서울대 미대(학·석사)를 졸업하고 영국 골드스미스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3년 석남미술상을 받았으며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원 작가로 선정됐다. 전시는 26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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