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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하노이 이후 3년,진짜 오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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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비핵화 의지, 우리가 속았나 속였나
"미국도 북한도 우리 편"이라는 착각
"능라도 함성이 최고 치적"이었다니

2019년 2월 이맘때 나는 베트남 하노이의 멜리아 호텔 로비에 진을 치고 있었다. 트럼프와의 회담을 위해 하노이를 찾은 김정은의 숙소였다. 당시 트럼프는 "김정은과 사랑에 빠졌다"고 했다. 하지만 사랑과 비핵화는 별개였다. 완벽한 '노딜'로 끝났다. 어설픈 중매자(한국) 혼자 사랑을 확신했었다.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었던 베트남 하노이의 멜리아 호텔 로비. 소지품 검사가 엄격히 이뤄지고 있었다. [연합뉴스]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묵었던 베트남 하노이의 멜리아 호텔 로비. 소지품 검사가 엄격히 이뤄지고 있었다. [연합뉴스]

당시 하노이 현장에서 회담 결렬의 원인으로 크게 두 가지의 '오해'를 지적했다. 첫째, 북한에 대한 오해. 우리 국민도, 미국도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갖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둘째, 트럼프와 미국에 대한 오해. 트럼프가 욕심을 부려 합의에 집착할 줄 알았는데, 미국의 시스템이 그걸 막았다. 미국은 북한 핵을 보며 이란의 핵까지 봤다. 북한은 '영변'이란 돋보기로 될 줄 알았지만, 미국 손에는 망원경이 들려있었다.

정확히 만 3년. 바뀐 건 무엇일까. 당시의 오해는 나만의 오해였을까.

먼저 북한의 비핵화 의지. 김정은은 하노이 회담 이듬해 7월 '비핵화'를 북미협상의 교환 조건에서 아예 없애버렸다. 올해 들어 두 달도 안 됐지만 일곱 차례나 미사일을 쐈다. 한국 정부는 굳이 아니라고 숨겨주려 했지만, 당사자인 북한은 "그거 최고속도 마하 10이 넘는 극초음속 미사일 맞는데요"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했다. 나아가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예고까지 했다. 영변 핵시설에선 여전히 우라늄 농축공장과 원자로를 가동하고 있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정보 관계자들은 "하노이 때 북한의 핵탄두 수가 30기 정도였는데, 3년 사이 60기 정도가 됐다"고 추정한다. 이쯤 되면 비핵화 의지를 우리가 북한에 속았거나, 우리가 전 세계를 속였거나 어느 한쪽이다. 어느 쪽인지 다음 정부에서 분명히 짚고 책임자도 찾아야 한다. 워싱턴 일각에서 나오는 "북한에 한국 정부 돈이 흘러갔다"는 소문의 진위도 반드시 다뤄야 할 것이다.

하노이 회담장에서 마주 앉은 미국과 북한. 북한은 통역 포함 4명이 참석했지만 미국은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까지 5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만을 고수한 북한과 달리 미국은 포괄적 핵폐기를 요구해 결국 결렬됐다.

하노이 회담장에서 마주 앉은 미국과 북한. 북한은 통역 포함 4명이 참석했지만 미국은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까지 5명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만을 고수한 북한과 달리 미국은 포괄적 핵폐기를 요구해 결국 결렬됐다.

다음 미국. 바이든 정부 들어 더더욱 행정부·의회·싱크탱크 모두를 설득시키지 못하면 결코 '고(Go)' 사인이 나지 않는 구조가 됐다. 그런 미국에 우리 정부는 하노이 이후 3년 내내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요구 수준을 낮춰달라"고 줄기차게 요구만 했다. "그래도 한국 부탁은 좀 들어줘야겠다"는 부채의식이라도 평소에 심어놨으면 또 모르겠는데, 그러지도 못했다. 비교하긴 싫지만 일본을 보자. 지난달 21일 미국과 일본이 2+2(외교·국방장관) 회담 후 내놓은 공동성명의 한 문장. "미·일 쌍방은 역할·임무·능력의 진화 및 공동계획 작업에 관한 힘찬 진전을 환영했다." 무슨 비밀암호 같다. 실은 "대만 유사시의 미·일 간 군사 공동대응 시뮬레이션이 이미 시작됐다는 완곡한 표현"(일본 고위관계자)이란다. 지난주에는 "우크라이나 유사시 유럽에 액화천연가스(LNG)를 제공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모두 미국이 간절히 원했던 것이었다. 과연 미국에 최우선 현안인 대만, 우크라이나 문제에 알아서 기여해주는 일본이 고마울까, 2019년 2월의 하노이에서 사고도 행동도 딱 멈춰있는, 그러면서 "바이든이 김정은에게 친서 1통 보내면 어떠냐" 등 끊임없이 요구만 내놓는 한국이 고마울까. 주는 게 있어야 오는 게 있는 법. 개인 간에도, 나라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게 외교이고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하노이 때도, 지금도 진짜 오해는 북한도, 미국도 아닌 "미국도 북한도 언제나 우리 편"이라 착각한 한국에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9월 19일 평양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장에서 연설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문 대통령은 지난주 인터뷰에서 한반도 외교의 가장 큰 치적을 묻는 질문에 "평양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15만 명 평양 시민들 앞에서 연설한 것이 남북관계에서 최고의 장면이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가슴 뭉클했을 순 있다. 하지만 비핵화 진전으로 이어지지 못한 '능라도 함성'을 5년 외교의 최대 치적으로 기억하다니, 우리 모두 기가 막힌 5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