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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파일] 명품 한 닢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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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호 31면

이창균 경제부문 기자

이창균 경제부문 기자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시달린 가정폭력, 중학생 때 맛 들인 담배. 공부는 해본 적이 없고 왜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대입에 실패하고 고졸 백수가 된 A는 취업을 알아봤지만 그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한 잡지를 펼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딱 봐도 비싼, 고급 정장과 손목시계로 중무장한 어느 젊은 부자가 사진과 함께 등장해 자수성가 경험담을 전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가 몸에 두른 명품이 A는 그렇게 좋아 보일 수가 없더란다. 나도 언젠간 저 사람처럼 좋은 옷, 좋은 시계를 가져야겠다고 A는 다짐했다. 피천득의 ‘은전 한 닢’ 등장인물처럼 그저 그게 갖고싶었단다. 그렇게 A는 난생처음 공부를 시작했다. 고소득 전문직이 돼 마음껏 명품을 구매할 날을 꿈꾸며.

명품 한 닢

명품 한 닢

약 20년 전의 A 못잖게 명품 한 닢(?) 획득에 열정적인 일부 MZ세대가 샤넬과 롤렉스 등을 목표로 한 ‘오픈런’에 나서면서 오늘도 전국 주요 백화점 앞은 발 디딜 틈이 없다.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서 오후 2시에야 매장 안에 들어갔다는 식의 경험담이 온라인에 줄을 잇는다. 수요를 공급이 못 따라가서 생긴 현상인데 최근 거의 매일같이 이를 전하는 뉴스에 비난 여론도 거세졌다. “명품이 뭐라고 그 난리를 치느냐” “사람이 명품이어야지” 등 댓글이 많은 공감을 얻는다. 모두 옳은 얘기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론 몇 가지가 더 뇌리를 스친다.

명품 같은 사람도 더러는 명품 장신구를 갖고싶을 수 있지 않을까. 자기 돈 자기가 원하는 대로 쓴다는데 불법적으로 모은 돈만 아니면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장려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유경쟁의 시장경제에서 비난할 일도 아니지 않나. 명품을 갖고서 남을 함부로 깔보는 언행을 한다든지 사회적 민폐를 끼치는 경우라면 비판해야겠지만 오픈런에 나선 이들이 그런다는 보장은 없다.

A처럼 한낱 명품을 자기 발전의 계기나 원동력으로 삼는 경우도 없지 않다. 2011년 국내에도 소개된 『지금 당장 롤렉스 시계를 사라』의 저자 사토 도미오는 “나한테 과한 물건이라고 여겨 구입을 포기하지 말고 갖고싶은 건 과감하게 탐하라”고 말한다. 갖고싶은 걸 가지려면 부자가 돼야 하니 더 열심히 돈을 모으게 된다는 논리다. 자제력이 부족한 독자한테는 위험한 논리이지만, 향상심이 부족한 독자에게는 도움 되는 말일 수도 있겠다싶다.

사실 MZ세대에게 오픈런은 그래도 제법 정직한 결과물이 기대되는 도전이다. 줄만 서면 어쨌든 매장 안엔 들여보내주고 운 좋으면 원하던 물건을 살 수 있다. 잘만 사면 투자가치도 충분하다.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에 많은 수의 MZ세대는 여생을 내내 줄 서도 내 집 안에 못 들어갈 공산이 커졌다. 어쩌면 이들이 체념하고 비싼 외제차나 시계, 핸드백 등에 몰리는 이유다. 그러니 명품 한 닢 정도는 아량으로 봐주면 어떨까.

다시 A의 얘기로 돌아가면, A는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결국 A는 소싯적 원하던 옷과 시계를 손에 넣었다. 명품 소비는 거기서 끝내고 지금은 자녀에게 돈 쓰는 재미로 살고 있단다. 그래서 물었더니 A는 손목에 찬 시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건 죽기 전까지 아들한테도 안 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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