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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정책 헛바퀴, 더 절박해진 청년 취업]“공정하다” vs “학력도 판단 근거”…블라인드 채용 평가 갈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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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5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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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에 블라인드 채용이 도입된 지 4년이 지났다. 학연·지연·혈연으로 발생할 수 있는 채용 과정의 비리를 없애 공정성을 높이고, 다양한 인재를 채용하겠다는 목표에서 2017년 하반기부터 공공기관에 전면 도입됐다. 최근에는 일부 민간 기업도 블라인드 채용을 시행하고 있다. 카카오가 대표적이다. 카카오 개발자 지원자는 이름, 이메일, 휴대전화 번호 등만 입력하면 누구나 1차 온라인 코딩테스트를 볼 수 있다. 나이·성별·학력·전공 등은 보지 않는다. SK그룹과 롯데그룹의 일부 계열사도 특정 직군에 한해 블라인드 채용 전형을 운영하고 있다.

실제 블라인드 채용 이후 공공기관 합격자들의 출신 학교는 다양해졌다. 223개 공공기관 및 공기업의 합격자 중 서울대·연대·고대 비중은 2016년 8%에서 2019년 5.3%로 감소했고, 수도권 소재 대학은 2016년 33.2%에서 2019년 29.6%로 감소했다. 반면 비수도권 대학은 43.7%에서 53.1%로 증가했다. 여성 합격자 비율도 2016년 34%에서 2019년 39%로 5%증가했다. 물론 지역인재할당제도 등이 있어 온전히 블라인드 채용의 효과로 볼 수는 없지만 합격자 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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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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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청년들은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에 동감한다. 하지만 ‘학력 노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서울 내 상위권 대학 졸업 후 공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김모(28)씨는 “자격증을 따는 게 좀 귀찮긴 했지만 투명하게 점수로 선발하니까 공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 공기업 재직자 이모(31)씨는 “오히려 블라인드 채용을 하면서 지역할당제를 시행해 지역 지원자에게 가점을 주는 게 더 불합리하다”고 덧붙였다. 반면 지역 4년제 대학 재학생 채지한(22)씨는 “기존 채용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엔 동의하지만 외모나 성별이 아닌 노력으로 얻은 학벌까지 가리는 건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서울 4년제 대학 재학생 김모(24)씨는 “공개되는 정보가 제한적이라 모든 공기업 준비생이 컴퓨터활용능력시험 등 가산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증을 따는데 상당한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있다”고 덧붙였다. 고학력 남성일수록 부정적일 것이라는 선입견과는 달리 블라인드 채용에 대한 시각은 개인별로 다양한 셈이다.

채용 담당자 입장에서 블라인드 채용 시 지원자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27년간 대기업 재직 후 현재 기업 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는 신모(58)씨는 종종 공공기관 채용 면접관으로 참여했다. 사기업 면접 경험이 많았던 그는 처음 블라인드 채용 지원자의 이력서를 봤을 때 굉장히 당황했다. 꼼꼼하게 읽어도 기본적인 정보만 있을 뿐 지원자의 특성을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모씨는 “절차적 공정만 따지는 지금대로라면 정성평가 비중이 줄어들어 말을 잘 못하거나 필기시험보다 실무에 강점을 지닌 사람이 떨어질 수 있다”며 “학벌이나 학점이 절대적 요소가 돼선 곤란하지만 비공개하는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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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이 필요한 전문가를 채용할 때가 특히 문제다.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지원하고 있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관계자는 “현장에서는 연구개발(R&D) 특성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한 현재 블라인드 채용 제도가 우수 연구인력 선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며 “출연연 연구인력 채용에서 지원자의 출신학교, 연구실, 지도교수 등의 정보는 ‘차별적 요소’가 아닌 연구경력을 평가하기 위한 ‘기본정보’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11월 출연연 소속 한 연구원은 페이스북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박사학위자를 뽑을 때는 지도 교수의 추천서를 요구하는데 우리나라는 추천서는커녕 어디에서 학위를 받았는지도 알 수 없다”며 “진정한 의미의 블라인드 채용은 학교 이름을 가리는 게 아니라 학교 이름을 공개한 상태에서도 채점 기준에 반영하지 않고, 실력으로만 채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입자가속기에 숙달된 물리학 박사 2명을 뽑을 때 최종 면접에 올라온 6명 중 3명이 가속기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던 사례도 언급했다.

실제 해외에서는 공공부문 채용을 진행할 때 출신 학교, 전공, 학점의 기재를 금지하는 사례가 드물다. 캐나다는 2017년부터 연방정부 6개 부처에 지원할 때 성명 기재를 금지했다. 인종 및 성별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력을 비공개하진 않았다. 지원자의 배경과 학력을 참조하지 않겠다고 밝힌 영국 공영방송 BBC도 학점은 본다.

김세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2019년 발표한 ‘공정 채용의 현실과 개선방안’에서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에서 학교뿐 아니라 전공과 학점까지 가린 것은 별다른 합리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민경률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연구위원도 보고서에서 “역량을 체계적으로 점검할 수 있는 툴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위와 전공 등이 정말 편견 요소인가에 대해서는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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