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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창업의 길]10초 만에 세포 순간냉각…의료기술 새 장 열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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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D 패러독스극복하자 (17) 리센스메디털 김건호 대표, UNIST 

리센스메디컬을 창업한 김건호 UNIST 교수가 미국 오스틴의 현지 법인에서 리센스의 정밀냉각의료기기를 들고 있다. 왼쪽은 안구 냉각마취용, 오른쪽은 냉각기능을 이용한 피부치료용으로 만들었다. [사진 UNIST]

리센스메디컬을 창업한 김건호 UNIST 교수가 미국 오스틴의 현지 법인에서 리센스의 정밀냉각의료기기를 들고 있다. 왼쪽은 안구 냉각마취용, 오른쪽은 냉각기능을 이용한 피부치료용으로 만들었다. [사진 UNIST]

 시력이 갑자기 나빠지더니 책을 읽을 때 글자 사이에 없던 공백이 보인다. 욕실의 타일이나 도로 중앙선과 같은 선이 굽어져 보인다…. 황반변성의 대표적 증상이다. 망막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황반에 없던 혈관이 생기면서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증세가 심해질 경우 실명에까지 이른다.  서구사회에선 65세 이상 노인의 실명 원인 1위가 황반변성이다. 한국도 식생활의 서구화가 진행되면서 최근 들어 환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2016년 14만5018명이던 황반변성 환자 수는 2020년 20만1376명까지 늘어났다. 치료방법이 있긴 하지만 좀 끔찍하다. 한 달에 한 번 안구(眼球)에 항체주사를 맞아야 한다. 이른바 ‘안내주사요법’(IVIㆍintravitreal injection)이라는 방법이다. 하지만 고역이다. 마취를 하긴 하지만 10분 정도의 시술 시간 동안 주사기가 눈에 들어온다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주사 후에도 통증을 호소하는 등 후유증이 만만치 않다. 때문에 아무리 맞아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게 환자들의 공통된 얘기다.

김건호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기계공학과 교수가 2016년 창업한 의료기기 벤처기업 리센스메디컬의 급속정밀냉각기술은 이런 황반변성 등 안질환자들에게 희소식이다. 열전소자(熱電素子)의 냉각기능을 이용해  안구를 섭씨 영하 15도로 순간 냉각하면서도 동상이 걸리지 않은 상태로 마취효과를 내는 방법이다. 인류는 높은 온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 통제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낮은 온도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하다. 김 교수는 전공인 열 제어 기술을 이용해 온도를 급속도로 내리고 이를 정밀하게 제어하는 기술을 연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마취용 기기를 개발했다.

리센스메디컬의 오큐쿨(OCU-COOL). 배터리로만 동작하는 접촉식 냉각마취기기로, 안구마취에 주로 쓴다.

리센스메디컬의 오큐쿨(OCU-COOL). 배터리로만 동작하는 접촉식 냉각마취기기로, 안구마취에 주로 쓴다.

김 교수는 “기존 약물 주사는 마취 시간이 10분 정도 걸리지만, 리센스메디컬의 마취기기를 안구 흰자위 끝에 접촉하면 마취에 10초, 시술까지 1분이면 끝난다”며 “눈이 충혈되거나 건조증, 주사 공포 등의 부작용에서 냉각 마취는 자유롭다”고 말했다.  냉각 속도와 시간, 정밀한 온도제어가 리센스메디컬의 핵심기술이다.  냉각기술을 이용한 치료방법이 기존에 없던 건 아니다.  암치료 방법 중 종양을 얼려 파괴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김 교수의 급속냉각 마취기술은 세포를 죽이는 게 아니라, 기능을 잠시 멈추게 한 뒤 다시 작동하게 한다.

리센스메디컬은 한국 기업이지만, 창업 초기부터 글로벌, 특히 미국 시장부터 공략하고 있다. ‘세상에 없는 기술’인만큼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글로벌 시장에서 먼저 인정받으면 한국 시장 개척은 더 쉬워진다”며 “한국과 달리 민간의료보험 시장이 발달한 미국은 의료수가가 높기 때문에 시장성도 높다”며 고 말했다. 미국의 무통시술 시장은 10억 달러(약 1조1965억원)에 달한다.

리센스메디컬의 급속정밀냉각기술은 2018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드 노보’(de Novo) 판정을 받아 신속 승인 절차를 밟고 있다. 드 노보란 새롭다는 뜻의 라틴어인데, 기존에 없었던 신기술에 적용되는 FDA 인허가 과정을 말한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이 미국 FDA에서 드 노보로 승인을 받은 사례는 없다. 현재 미국 내 9개 병원에서 임상 1,2상을 끝내고 ‘임상 3상’을 진행하고 있다. 내년 초 승인이 목표다.

리센스메디컬의 타켓쿨(Target Cool). 극저온냉매 정밀제어를 통한 비좁촉식 냉각마취기기다.

리센스메디컬의 타켓쿨(Target Cool). 극저온냉매 정밀제어를 통한 비좁촉식 냉각마취기기다.

김 교수는 “임상에 참여한 90%가 넘는 환자들이 냉각마취에 만족하고 있으며, 8개월에 걸친 반복 임상을 완료한 환자들 모두가 냉각마취 계속 사용을 위한 방안을 문의하고 있다”며 “10초 마취발현으로 전체 시술시간 또한 5배 이상 줄어드는 데이터 또한 나오고 있어 미국 의료현장의 반응도 뜨겁다”고 말했다.

리센스메디컬은 국내에서도 일찌감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2018년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차세대 의료기기 100으로 뽑혔고, 2020년 중기벤처부에서 선정하는 바이오헬스 분야 유망 중소벤처기업에도 선정됐다. 신용보증기금에서도 ‘혁신 아이콘’에 선정돼 최대 100억원의 정책자금을 받을 수 있다.  72억원 규모의 시리즈B와 350억원 규모의 시리즈C 등 지금껏 총 531억원의 투자를 받았다.

리센스메디컬의 급속정밀냉각기술은 안질환 환자 외에도 피부과와 정형외과 염증치료 분야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냉각 온도와 시간을 정밀하게 조절하면 냉각된 대상의 비정상 면역체계와 염증반응이 변화하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치료효과를 볼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다. 치료 부위의 온도를 영하 70도에서 영상 5도까지 치료 목적에 맞게 정확하게 설정하는 기술도 확보했다. 극저온 냉매를 0.1초 단위로 제어하는 정밀온도제어기술이 적용됐다. 덕분에 정밀저온치료기기로는 국내 식약처뿐 아니라 미국 FDA와 유럽 CE에서 이미 허가를 받았다.

리센스메디컬.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리센스메디컬.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김 교수는 “냉각온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아토피피부염과 같은 염증을 억제할 수 있고 원형탈모나 습진과 같은 면역조절 이상으로 인한 질병도 해결할 수 있다”며“치료 효과가 좋고, 잠재성이 큰 분야부터 정식 임상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열전소자와 열제어 전문가다.  2014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열전소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시간대 재직 시절 의사 두 명과 함께 열전소자를 이용한 급속정밀냉각기기 시제품을 만들고 동물실험까지 마쳤다. 2016년 귀국, 울산과학기술원(UNIST) 교수 부임과 동시에 리센스메디컬을 창업했다. UNIST 규정에 따르면 신규 임용된 교수는 3년이 지나야 창업할 수 있지만, 학교는 특별위원회를 열어 김 교수에게 임용 첫해에 창업할 수 있도록 예외를 허용했다. 그는 “세포 냉각의 정량적 조건을 다룬 논문이 없어 치료 방법을 재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연구를 시작했다”며 “연구 결과가 안질환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곧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교수 임용 전부터 창업을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재 리센스메디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지만, 랩지노믹스와 랩토ㆍ제테마를 성공적으로 상장한 경험을 쌓은 김세왕씨를 최고재무전문가(CFO)로, 삼성전자 의료기기 부문과 GE헬스케어에서 품질관리 매니저로 경험 쌓은 백종환씨를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영입해 경영 경험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고 있다.

교수 임용과 동시에 창업을 하면 연구와 학생지도는 어떻게 해왔을까. 김 교수는 “매학기 3과목 9학점을 강의하고 랩에는 석사과정 2명, 박사과정 3명을 지도하고 있다”며“지금껏 등록 15건을 포함해 60건의 특허출원을 했고, 네이처 머티어릴스와 셀 등 국제학술지에 논문도 실었다”고 말했다. 다만, 급속정밀냉각기술을 이용한 의료장비가 미국에서 FDA 승인을 앞두고 있고, 국내에서도 내년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어 지난해 9월부터 교수 휴직을 한 상태다. 동시에 미국 텍사스 오스틴에 미국 판매법인 리센스(Recens, Inc)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미국시장 공략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뛰어난 바이오기술(BT)과 정보기술(IT) 인프라를 바탕으로 제조를, 글로벌 시장으로 열려있는 미국에선 제품판매를 한다는 계획이다.

이용관 블루포인트파트너스 대표는 “기존 마취는 세포 약물 반응이라 시간이 줄이는데 한계가 있었는데 리센스메디컬은 급속정밀냉각기술이라는 새로운 시도로 시술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며“혁신적인 기술과 대학의 전폭적인 창업지원 등을 보고 초기 씨드(SEED) 투자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판단이 유효했다는 게 증명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용훈 UNIST 총장은 “의료기기 제조기업이 국내에서 성장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라 미국 시장을 먼저 두드려 진출할 수 있도록 학교 창업지원팀에서 도왔다”며“오늘날 연구중심대학은 학문적 탁월성과 함께 기술의 혁신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 기업을 만드는 두 가지 목표를 같이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건호

1980년생. 서울대 기계및 항공우주공학과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미시간대 기계공학과에서 석ㆍ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시간 에너지연구소 리서치 펠로우와  미시간대 재료과학및 공학 박사후연구원으로 경력을 쌓은 뒤, 2016년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기계공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리센스메디컬 최고경영자(CEO)도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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