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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찬란한 삶" 中 열광한 코치, 안셴주의 씁쓸한 정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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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국 쇼트트랙이 혼성계주 금메달이 확정 된 뒤 손을 들고 기뻐하는 김선태 감독(왼쪽)과 빅토르 안(오른쪽) 기술 코치. [연합뉴스]

중국 쇼트트랙이 혼성계주 금메달이 확정 된 뒤 손을 들고 기뻐하는 김선태 감독(왼쪽)과 빅토르 안(오른쪽) 기술 코치. [연합뉴스]

지난 5일 베이징 겨울올림픽 쇼트트랙 2000m 혼성 계주에서 중국이 압도적인 질주로 금메달을 확정하자 빅토르 안(37·한국명 안현수)이 두 팔 들고 소리를 질렀다. 중국 CCTV는 “중국 쇼트트랙 성과 뒤에 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전설의 거성’ 안셴주도 그 중 한 명”이라고 조명했다. 시나스포츠는 “한국에서 러시아 입적 후 중국을 가르친: 중국 금메달의 배후 공신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찬란하다”며 안셴주 띄우기에 나섰다.

안셴주는 안현수(安賢洙)의 중국어 발음이며, 대회 등록명은 빅토르 안(Viktor Ahn)이다. 반면 한국 스포츠 팬들 중 그가 환호하는 장면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는 이들이 많았다.

안현수, 빅토르 안, 안셴주. 그는 무려 세 나라 소속으로 올림픽에 참가했다. ‘스포츠 노마드(nomad·유목민)’ 빅토르 안을 향한 한국과 중국의 시선은 엇갈린다.

중국 쇼트트랙 기술 코치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그는 총 3가지 국적으로 올림픽 참가했다. [연합뉴스]

중국 쇼트트랙 기술 코치 빅토르 안(한국명 안현수). 그는 총 3가지 국적으로 올림픽 참가했다. [연합뉴스]

안현수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서울 태생인 그는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압도적인 레이스로 금메달 3개를 휩쓸었다.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해 ‘빅토르 안’으로 개명한 그는 2014년 러시아에서 열린 소치올림픽에서 다시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선수로 올림픽에서만 금6, 동2개를 쓸어 담은 그는 ‘쇼트트랙의 마이클 조던’, ‘쇼트트랙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불렸다.

2020년 은퇴한 그는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기술 코치로 부임했다. 한 쇼트트랙 관계자 A씨는 “토리노올림픽에 함께 참가했던 왕멍 전 중국 대표팀 감독(현 CCTV 해설위원)이 안현수를 좋게 보고 합류를 제안했다. 2019년 중국에서 훈련하면서 중국 측과 교감을 나눴다”고 전했다.

쇼트트랙 관계자 B씨는 “김선태 현 중국대표팀 총감독이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정식 감독이 아니었다. 김 감독을 데려간 쪽이 주도해 안현수 코치까지 무난하게 영입할 수 있었다”며 “안현수는 러시아에서 감독 제의가 있었지만, 중국 코치를 받아 들였다고 들었다. 러시아가 제시한 금액이 적지 않았는데 중국이 더 많다는 얘기가 있다”고 전했다. 안현수의 연봉은 300만 위안(5억6000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빙상 관계자들은 안현수에 대해 언급하는 걸 조심스러워해서 익명으로 인터뷰를 했다.

맨 앞에서 서서 중국 선수들의 훈련을 이끄는 빅토르 안(오른쪽). 김경록 기자

맨 앞에서 서서 중국 선수들의 훈련을 이끄는 빅토르 안(오른쪽). 김경록 기자

베이징에서 지켜 본 빅토르 안은 ‘코치’라기보다는 ‘선수’ 같았다. 일반적으로 쇼트트랙 코치들은 랩 타임을 불러주고 훈련 내용을 짚어주거나 비디오 분석을 하는 정도다. 그런데 빅토르 안은 중국 선수들과 다른 트리코(유니폼)를 입었지만 함께 스케이트를 타며 얼음을 지쳤다. 계주 연습을 할 때는 함께 달리며 엉덩이를 밀어줬다. 주로 중국 여자선수들의 훈련을 도왔고, 한국어 통역이 있지만 직접 대화하는 모습도 자주 비쳤다. 그는 개막을 앞두고 공식 연습 때 한국 선수들을 유심히 지켜보기도 했다.

쇼트트랙 관계자 A씨는 “안현수 보직이 ‘기술 코치’다. 중국 선수들이 안현수 같은 레전드와 함께 탄다는 건 ‘어마무시’한 효과가 있다. 어느 코스에서 추월할지, 어디에서 가속할지 바로 옆에서 몸소 느낄 수 있다. 말로 아무리 얘기해줘도 한계가 있다”고 했다. 이어 A씨는 “중국이 올 시즌 월드컵 대회에서는 몸이 무거웠는데 올림픽에 초점을 맞춘 것 같다. 남자 1000m에서 중국 선수들이 다 앞으로 치고 나와 레이스를 끌고 갔다. 전통적으로 한국 지도자들은 ‘선 체력, 후 기술’, 체력 훈련을 굉장히 많이 시키는데, 중국 선수들이 안현수처럼 스피드와 지구력이 좋아진 모습이었다. 또 자기들(중국)이 앞에서 막고 있는데 상대가 뒤에서 건드리면 (주최국 이점으로) 실격 처리될 수 있어서 자신감을 갖고 임하는 것 같다. 중국 쇼트트랙이 앞으로 메달을 더 딸 것 같다”고 전망했다.

김선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오른쪽)과 빅토르 안 코치가 선수들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김선태 중국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오른쪽)과 빅토르 안 코치가 선수들 훈련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김경록 기자

빅토르 안은 공식 석상에서 항상 모습을 감췄다. 중국 취재진은 물론 한국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도 사양했다. 자칫 중국 대표팀 상황이나 전략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서인 듯 했다. 5일 혼성 계주 금메달을 딴 뒤에도 김선태 감독만 인터뷰를 했다.

중국 선수들 사이에서는 딱 ‘외국인 코치’ 정도 느낌이다. “한국인 코치진이 금메달 획득에 얼마나 도움이 됐냐”는 질문에 중국 우다징은 “나의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이다”고 답했다. 2018년 평창올림픽 남자 500m 금메달리스트인 우다징은 한국인 지도자가 없을 때도 금메달을 딴 적이 있다는 의미였다. 우다징은 2014년 소치올림픽에선 안현수에게 추월당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소치올림픽에서 압도적인 레이스로 금메달 3개를 휩쓴 안현수.  [뉴스1]

소치올림픽에서 압도적인 레이스로 금메달 3개를 휩쓴 안현수. [뉴스1]

2011년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는 2017년 예능 ‘현장토크쇼 택시’에 출연해 “당시 왼쪽 무릎이 골절 돼 1년 간 4번 수술을 했다. 국내 대회에서 성적도 못 냈고, (성남)시청 해체 후에도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며 “아버지가 러시아빙상연맹 회장님과 연락이 닿아 어렵게 기회가 생겼다. 한국에서 받지 말라는 연락도 있었다는데, 회장님이 제 눈에서 의지를 보셨다고 들었다. (국적 포기에 대해)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옆에서 가족들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4년 전 소치올림픽 당시 많은 국내 스포츠 팬들은 대한빙상경기연맹을 질타하며 “대한민국이 안현수를 버렸다”고 했다. 안현수, 심지어 러시아 쇼트트랙을 응원하기도 했다. 안현수가 프로야구 롯데 팬인 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맨 앞에서 서서 중국 선수들의 훈련을 이끄는 빅토르 안(오른쪽). [뉴스1]

맨 앞에서 서서 중국 선수들의 훈련을 이끄는 빅토르 안(오른쪽). [뉴스1]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선 다른 반응이다. “러시아에 간 것까지는 이해하는데, 중국까지 간 건 좀...”이란 시선이다. 최근 반중 정서가 강해진 데다, 한국체대 출신 안현수가 파벌싸움의 ‘희생양’이면서도 ‘수혜자’란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또 안현수가 귀화 전에 체육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한 게 알려지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국적은 러시아고, 돈은 중국에서 버는데, 가족은 한국에서 지내는가”고 지적했다. 한국인 아내는 한국에서 화장품 사업을 했다. 국내 비판 여론을 의식한 탓인지 안현수는 인스타그램 댓글을 차단했다.

훈련 도중 생각에 잠긴 빅토르 안. 김경록 기자

훈련 도중 생각에 잠긴 빅토르 안. 김경록 기자

반면 “세계적으로 능력을 인정 받은 이의 개인 선택”이라는 주장도 있다. 쇼트트랙 관계자 B씨는 “안현수가 러시아에 갈 때 이중국적이 허용되는 줄 알았고 한국 국적을 포기해야 하는 줄 몰랐다. 이후 논란으로 많이 속상해 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어 “한국 쇼트트랙 지도자 연봉은 4000만~6000만원 정도인데, 러시아와 중국은 최고 대우를 해줬다. 안현수를 비난한다면 다른 나라 양궁·태권도 대표팀을 지도하는 한국 코치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고 말했다.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지도하는 박항서 감독도 같은 입장이란 논리다. 하지만 차이는 귀화 여부다.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이해 가는데, 정서적으로는 용납하기 힘든 느낌이다. 소치올림픽을 앞두고 귀화 배경에서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 대표팀에서 다시 보게 되니까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파울루 벤투(포르투갈),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전·현직 한국축구대표팀 감독은 국적을 불문하고 직업인으로서 전 세계를 상대로 성적을 담보로 모험을 건다. 자신을 원하는 국가에서 조건과 연봉이 맞으면 갈 수 있는 걸 충분히 이해한다. 다만 한국 쇼트트랙 대표팀이 넘어지며 탈락했고, 중국이 우승한 뒤 안현수 코치와 김선태 감독의 얼굴을 보니 착잡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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