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태유의 퍼스펙티브

은퇴 후에도 생산적으로 일하는 이모작 사회 만들어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저출산·고령화의 근본 해법

퍼스펙티브

퍼스펙티브

대선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다음 대통령은 임기 5년이 아니라 국가 백년대계를 결정하는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코로나 팬데믹 위기, 부동산 불로소득 거품, 국가 부채와 가계 부채 폭증 등 내일 당장 한국 경제에 어떤 재앙이 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산적한 난제 중 다음 대통령이 추진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단연 저출산 고령화 대책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구문제연구소는 2016년 당시 합계출산율 1.17을 기준으로 한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국가가 될 수 있다고 추정했다. 정부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2006년부터 15년간 저출산 고령화 대책에 국민 혈세를 380조원이나 쏟아부었다. 그러나 출산율은 0.84로 떨어졌다. 무언가 잘못 해도 근본적으로 잘못하고 있다. 도대체 언제부터 인구 폭탄이 인구 소멸로 바뀌었나?

380조원 세금 쏟아부었는데도 저출산·고령화 문제 더욱 심각
세대 간 분업으로 일하는 사람 늘리고 부양받는 사람 줄여야
젊었을 때는 유동지능 필요한 산업·기술·경영·패션 등에서 일하다
나이 들면 결정지능 필요한 행정·관리·상담 등에서 일하게 해야

인구 보너스에서 인구 오너스로

농업사회에서 높은 출산율은 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영양 상태가 개선되고 질병이 퇴치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산아 제한에 성공하면 유소년 부양 비용이 절약되어 경제가 발전한다. 이것이 인구 보너스(Demographic Bonus)의 축복이다. 경제발전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면 공간 밀도가 높아져 과당 경쟁으로 내몰리게 돼 출산율이 낮아진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 문명의 지속과 번영을 향한 새 출발일 수 있다. 왜냐하면 현재 80억 세계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로 인류 문명의 종말이 앞당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거대 자본과 첨단 기술을 확보한 선진국은 저출산으로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도 인공지능 로봇 혹은 개도국 인력을 활용해서 극복해나갈 수 있다. 그러나 후발국은 나라가 부자가 되기 전에 인구가 늙어버리는 미부선로(未富先老) 현상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인구 오너스(Demographic Onus)의 재앙이다. 경제성장 속도가 저출산 속도를 앞서면 선진국이 되고, 뒤지면 개도국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마치 사슴이 사자보다 빨리 뛰면 살고 늦게 뛰면 죽는 것과 같은 세상의 법칙이다.

소수가 다수 부양하는 죽음의 계곡

한국은 높은 인구 밀도, 과도한 도시 집중, 교육 경쟁 과열 등 세 가지 현상이 공간 밀도를 높임으로써 세계에서 저출산 속도가 가장 빠른 국가가 되었다. 공간 밀도 악화의 주범은 주거용 부동산 정책의 실패다. 자유시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는 경우를 시장 실패(Market Failure)라고 한다. 공급 확대를 통한 수급 균형이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짓밟고 저출산 재앙을 초래하였다. 380조원의 혈세를 쏟아부어도 안 된다니 이제 문제의 근본부터 되짚어 보자.

한국이 사라진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착각이다. 인구 과잉과 과당 경쟁이 초래한 저출산은 인구가 감소하면 저절로 해소된다. 인구가 줄어들면 국가 경제가 위축된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인구 1억 명 이상 14개국 중 선진국은 미국·일본밖에 없다. 선진 복지국 스칸디나비아 3국과 강소국 베네룩스 3국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네덜란드는 1700만 명이다.

인구 밀도가 줄어드는 것은 도리어 반길 일이다. 문제는 인구 비율이다.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과 고령화는 인구 분포를 역피라미드 형태로 만든다. 물론 언젠가 저출산 추세가 안정되고 인구 분포가 사각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소수가 일해서 다수를 부양해야 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을 넘어야 한다. 그렇다. 문제는 인구 부양비(dependency ratio)다. 저출산 대책의 정책 목표를 ‘출산율 회복’에서 ‘인구 부양비 개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무조건 정년 연장’은 개선 아닌 개악

목표는 당연히 일하는 사람을 늘리고 부양받는 사람을 줄이는 것이다. 정년 연장은 풍선효과로 청년 실업을 초래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년 연장으로 근로자 평균 연령이 고령화되면 신기술에 적응이 어려워 철강·기계·자동차·가전 등 기간사업이 국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정년 연장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다.

노후 창업은 자영업 과당 경쟁으로 인해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경력 단절 여성과 유능한 고령자 활용은 필요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외국인 이민도 도움은 되겠지만, 효과가 제한적이다. 연금 개혁도 꼭 필요하지만, 보완적 해결책이다.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대책은 저출산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도시 집중과 교육 경쟁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책의 원리를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마치 미국에서 음주 문제를 금주법(Prohibition·1919년)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만큼이나 무책임한 정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령자가 청년보다 생산성 높은 분야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저출산 고령화의 해결책을 찾아 이론과 정책을 섭렵하기를 10여년 만에 발달심리학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젊은이는 유동지능(Fluid Intelligence)이 높은데, 이는 계산력·공간력·추리력 등 산업·기술·경영·패션 등의 직업에 적합한 능력이다. 나이가 들면 유동지능이 쇠퇴하고 결정지능(Crystallized Intelligence)이 높아지는데, 이는 이해심·판단력·인내력 등 행정·관리·상담 등의 직업에 적합한 능력이다. 그렇다면 청년은 유동지능이 필요한 직업군으로 진출하도록 하고 은퇴할 때쯤 결정지능이 필요한 직업으로 옮겨 인생 이모작을 하도록 하면 된다.

지금까지 정년 연장, 노후 창업 등의  정책이 모두 실패한 원인은 고령자가 청년 대비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모작 사회’는 세대 간 분업을 통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 고령자도 결정지능을 필요로 하는 이모작 직업에서는 청년 못지않은 생산성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가자, 이모작 사회로!

이순신·권율 뒷받침한 정걸 장군의 이모작

정걸

정걸

이순신의 제해권과 권율의 행주대첩이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했다. 바다에서 연전연승이 왜군의 해상 보급과 북진을 막았고, 육지에선 행주대첩이 전세 역전의 분기점이 되었다. 그런데 그 승리 뒤에는 두 번 다 정걸(丁傑, 1514~1597년) 장군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걸은 전라 좌·우도 수군절도사와 병사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8세에 31년 연하 이순신 휘하에 조방장(助防將)으로 현역에 복귀한다.

조방장은 방어와 병참 지원을 주로 한다. 이순신이 큰아버지뻘 되는 정걸을 조방장으로 영입한 것은 정걸의 경험과 경륜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리라. 전술의 천재 이순신과 경륜이 충만한 정걸은 23전 23승의 신화를 창조한 찰떡궁합이었다.

정걸은 행주산성 전투에도 참전한다. 행주산성은 한강을 끼고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권율은 1만 병력으로 왜군 정예병 3만과 맞선다. 파상 공격을 감행한 왜군 제6대가 제1 목책을 넘었을 때 조선군 진영이 술렁였다. 화살이 떨어진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 충청병사 정걸이 화살 2만 개를 싣고 왔다. 『선조실록』 35권은 “그날 묘시로부터 신시에 이르도록 싸우느라 화살이 거의 떨어져 가는데 마침 충청병사 정걸이 화살을 운반해와 위급을 구해주었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순신과 권율 두 명장이 객관적인 전력이 절대 열세인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했다. 전쟁의 승패는 스포츠 기록만큼이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전력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산도 병력도 부족한 조선군이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이순신과 권율의 천재적 전술이 젊음에서 우러난 유동지능이라면, 정걸의 완벽한 후방 지원은 경륜에서 우러난 결정지능이다. 국난 극복의 비밀은 바로 정걸의 인생 이모작이었다. 380조원의 혈세를 투입해도 안 되는 저출산·고령화 해결의 실마리를 노익장 정걸 장군의 우국충정에서 찾을 수 있다. 세대 간 분업에 의한 국민 경제 이모작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 가능한 정책임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