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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대선 뒤로 미룬 에너지 파동, 10월 인플레 폭탄 터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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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눈앞에 닥친 '그린플레이션' 위기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거대한 ‘회색 코뿔소’가 한국 경제를 향해 쿵쿵 달려오고 있다. 에너지값 폭등과 물가 상승이란 코뿔소다. 국제정세 불안에 범세계적 에너지 전환 바람으로 지난해 초부터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3대 에너지 가격이 한꺼번에 치솟았다. 그런데도 현 정부는 대선을 의식한 탓인지 인상 시기를 3월 선거 뒤로 미뤘다. 인상 요인이 있을 때 제때 올리지 않으면 후유증이 막대하다. 시장의 충격 완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 에너지 수요의 80% 이상을 수입하는 한국이다. 국가경제 전체에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정치권과 일반 국민은 에너지 위기를 못 느끼는 듯하다. 8개월 뒤에 펼쳐질 상황을 예상하며 전문가들의 진단과 처방을 소개한다.

석탄발전 축소에 물가폭등 우려 #에너지가격 억제하며 위기 숨겨 #유류세 20% 인하, 오래 가지 못해 #전기·가스, 10.6~16% 인상 예정

지난해 11월 단행된 정부의 유류세 인하 이후에도 휘발유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일 기준 전국 평균가격은 리터당 1668원, 서울은 1741원으로 조사됐다. 사진은 2일 서울 한 주유소의 유가판. [뉴시스]

지난해 11월 단행된 정부의 유류세 인하 이후에도 휘발유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일 기준 전국 평균가격은 리터당 1668원, 서울은 1741원으로 조사됐다. 사진은 2일 서울 한 주유소의 유가판. [뉴시스]

새 정부 출범 5개월째인 2022년 10월, 중산층 가정의 가장 A씨는 한꺼번에 뛴 에너지 가격과 들썩이는 물가에 놀랐다. 휘발윳값은 리터당 평균 2000원을 돌파했다.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 선을 넘은 데다 한 차례 연장됐던 유류세 인하마저 끝난 탓이다. 올 초 가격인 리터당 1626원에 비하면 23%나 상승한 셈이다. 전기료와 가스료 역시 예고된 대로 각각 10%, 16%씩 올랐다. 휘발유와 전기, 가스 모두 경제 활동의 원동력이다. 이들의 가격 상승은 거의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비용 인상으로 직결된다. 한국은행이 제시한 인플레 목표치 2%는 진작 물거품이 됐다. A씨는 월급 빼고 다 오르는 물가로 걱정이 태산이다.

                                                  그래픽=최종윤

그래픽=최종윤

리터당 유류세 164원 환원
 8개월 뒤를 그린 가상의 세상이지만 현 추세라면 이대로 될 공산이 크다. 유가 변동 폭을 뺀 나머지 전기 및 가스 요금 인상은 기정사실이다. 휘발유의 경우 국제 원윳값이 치솟았던 지난해 11월, 정부는 유류세 20%를 감면했다. 리터당 820원이던 유류세를 656원으로 164원 인하한 것이다. 유류세 인하는 한시적 조치로 원래는 올 4월 말이면 끝나게 돼 있다. 그러나 최근에도 유가가 떨어지기는커녕 계속 올라 정부는 고육지책으로 유류세 인하 조치를 3~4개월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지난달 18일 터키 남부 파자르시크 주변을 지나가는 이라크-터키 간 송유관이 원인 모를 이유로 폭발했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오르던 유가가 더 치솟았다. 사진은 폭발한 송유관에서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 [AP]

지난달 18일 터키 남부 파자르시크 주변을 지나가는 이라크-터키 간 송유관이 원인 모를 이유로 폭발했다. 이로 인해 가뜩이나 오르던 유가가 더 치솟았다. 사진은 폭발한 송유관에서 불길과 함께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모습. [AP]

 그럼에도 유류세 인하를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는 터라 10월이면 리터당 164원이 오를 가능성이 크다. 현재 원유가는 지난해 말부터 이어진 국제정세 불안으로 계속 오르는 추세다. 지난달만 해도 이라크-터키 간을 잇는 송유관 폭발 사고가 일어난 데다 주요 석유 생산국인 아랍에미리트(UAE)에 대한 예멘 반군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 원유 생산에 차질이 빚어질 위험이 적잖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과 러시아 간 충돌이 빚어지면 러시아산 원유 공급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 같은 각종 악재로 전문가들은 브렌트유가 배럴당 100달러 선을 돌파할 공산이 크다고 본다. 배럴당 100달러를 넘었던 2012년 5월 당시 한국의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2000원을 돌파했었다. 2일 브렌트유는 배럴당 90달러 안팎에 거래됐다.

지난달 13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에 위치한 항구에서 인부들이 바지선에 선적한 석탄을 트럭에 옮겨싣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자국 내 수요가 급증하자 지난달 초부터 석탄 수출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석탄 가격이 급등했다. [로이터]

지난달 13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에 위치한 항구에서 인부들이 바지선에 선적한 석탄을 트럭에 옮겨싣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자국 내 수요가 급증하자 지난달 초부터 석탄 수출을 금지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석탄 가격이 급등했다. [로이터]

국제정세 불안으로 뛰는 석탄·가스값
 주요 전력원인 석탄 및 천연가스의 수급 사정도 나쁘긴 마찬가지다. 석탄 가격은 2020년 5월 이후 500% 이상 올랐다. 특히 지난달에는 석탄 부국인 인도네시아가 자국 내 수요 증가를 이유로 수출을 금지하면서 톤당 가격이 연초 이후 한 달 만에 23.4%나 뛰었다. 지난해 11월 문재인 대통령이 2050년까지 석탄 발전을 폐지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2020년 현재 석탄 발전 비중은 전체 전력원의 44%를 차지해 가장 높다. 석탄 가격 상승이 전기료 인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터라 적자에 허덕이는 한전은 4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10.6%, 즉 kWh당 11.8원씩 올리기로 했다.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우크라이나 서부 볼로베츠 가스저장소의 2015년 7월 모습. 우크라이나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러시아는 지난해 말 독일 등 서유럽에 공급해온 천연가스 양을 대폭 줄였다. 이로인해 유럽에 천연가스 파동이 일어났다. [AP]

러시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지나가는 우크라이나 서부 볼로베츠 가스저장소의 2015년 7월 모습. 우크라이나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러시아는 지난해 말 독일 등 서유럽에 공급해온 천연가스 양을 대폭 줄였다. 이로인해 유럽에 천연가스 파동이 일어났다. [AP]

 천연가스 사정은 더 안 좋다. 지난해 유럽에 바람이 안 불어 풍력발전이 맥을 못 췄다. 그 부족분을 가스 발전으로 충당하는 바람에 가격이 확 뛰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여기에 불을 질렀다. 주요 수출국인 러시아가 서방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지난해 말 유럽으로 가는 가스관을 잠갔다. 여기에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 각국이 석탄 대신 가스 발전으로 돌면서 수급 사정이 급속히 나빠졌다. 에너지 전환 정책이 천연가스 파동을 부른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가스공사도 올 5, 7, 10월 세 차례에 걸쳐 MJ(메가줄) 당 2.3원씩 인상하기로 했다. 16% 올리는 셈이다.
 요컨대 지난 1~2년 전부터 석유·석탄·천연가스 등 3대 에너지 가격이 한꺼번에 급등해 한국 경제는 심각한 상황에 몰린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은 무역 지표를 보면 당장 알 수 있다.  지난달 수출액은 553억 달러에 달해 1월 액수로는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수입은 전년도보다 35.5% 늘어난 602억 달러를 기록, 49억 달러의 적자를 냈다. 수입 내용을 들여다보면 이 같은 적자가 에너지 폭등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석유·석탄·천연가스의 지난달 수입액은 160억 달러로 지난해 1월 69억 달러보다 2.3배나 늘었다.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 석탄발전소인 전남 여수의 호남화력발전소 1·2호기가 지난달 31일 자정을 기해 가동을 중단했다. [연합뉴스]

국내 현존하는 최고(最古) 석탄발전소인 전남 여수의 호남화력발전소 1·2호기가 지난달 31일 자정을 기해 가동을 중단했다. [연합뉴스]

의도된 에너지 파동 불감증
하지만 총체적 에너지 파동이라고 할만한 이 같은 심각한 사태를 일반 국민은 못 느끼고 있다.  현 정부가 유류세 인하 및 전기·가스료 인상 보류를 통해 가격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이 끝나면 줄줄이 오르게 돼 있다. 현 정부는 특히 탈원전 정책에다 2050년까지 석탄 발전을 폐지하겠다는 에너지 전환을 공언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석탄 대신 천연가스를 이용, 온실가스를 덜 배출하는 방식으로 발전하면 비용이 더 들어 전기료가 오르게 된다. 결국 청정에너지로의 전환이 물가 상승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환경보호의 상징인 그린(Green)과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쳐 ‘그린플레이션(Greenflation)’이라 부른다.

 정태용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현 정부가 30년 내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겠고 하면서 원자력도, 석탄도 안 된다고 하면 에너지 공백은 천연가스로 막을 수밖에 없다”며 “천연가스가 폭등하는 상황에서 에너지 가격 인상만 대선 후로 미루는 것은 차기 정부에 물가 폭탄을 떠넘기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정 교수는 “결자해지 차원에서 이번 정부도 부담을 나눠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 안보 전문가인 안세현 시립대 교수는 지난 1일 ″지금은 에너지 전환, 탄소중립보다 에너지 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본인 제공]

에너지 안보 전문가인 안세현 시립대 교수는 지난 1일 ″지금은 에너지 전환, 탄소중립보다 에너지 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진 본인 제공]

안세현 교수 인터뷰
 갈수록 어려워질 상황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방, 특히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에너지 분야에서도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다음은 에너지 안보 분야의 권위자인 안세현 시립대 교수와의 일문일답.
 -현 에너지 위기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유럽발, 중국발 에너지 위기가 시작됐다.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했다. 유럽에 바람이 안 불어 가스값이 7배, 8배 올랐다. 바람이 안 불면 천연가스로 발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차단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 전환이 중단됐다. 영국은 석탄 발전을 다시 돌리고 에너지 전환을 외치던 노르웨이도 북해의 석유 시추 재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독일도 가스 발전소를 100년 전 중단했던 원유 발전소로 개조했다. 이런 상황을 두고 유럽에서는 ‘올드 이코노미의 복수’라고 한다.”
 -한국은 어떤가
 “정부도 언론도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관심이 없다. 몰라서 그런 것도 있고, 정부, 학계, 언론계, 심지어 에너지 분야까지 ‘에너지 전환’이라는 명분에 온 나라가 집단최면에 걸린 듯하다. 지금은 에너지 전환, 탄소중립보다 에너지 위기가 더 시급하다.”
 -탄소중립이 틀리다는 얘기인가.
 “탄소중립은 가야 할 길이고 맞는 방향이다. 누구든 깨끗한 환경에서 살려 한다. 하지만 클린 에너지라는 천연가스는 가격이 너무 올라 발전 비용이 막대해졌다. 이럴 경우 지금의 유럽처럼 어쩔 수 없이 석탄 또는 심지어 석유 발전까지도 해야 한다. 탄소중립이 실제로 가능한 나라는 핀란드·노르웨이나 아프리카 섬나라처럼 인구는 적고 재생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소수에 불과하다. 심지어 노르웨이도 사실상 탄소중립 재조정에 들어갔다. 미국·러시아·일본·중국·브라질, 그리고 거의 모든 유럽 국가가 석탄 발전을 한다. 한국만 안 하겠다고 한다.”
 -어떻게 에너지 위기에 대처해야 하나.
 “석유에다 천연가스까지 풍부한 미국은 이제 날개 달린 호랑이가 됐다. 유럽에 가스가 모자라자 미국이 나서서 공급해줬다. 미국을 주목해야 한다. 에너지 문제를 안보 및 통상, 심지어 일자리 문제와도 연결해 미국을 활용하는 게 좋다. 우리는 미국과의 동맹 관계를 에너지 위기 해결의 수단으로 활용하지 못해왔다. 카타르에서 천연가스를 들여올 때 미국이 도와주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는가. 이것이 진정한 경제 안보 동맹이다. 아울러 엑손모빌(Exxon Mobil) 같은 국제 메이저 에너지 회사들과도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해야 한다. 이들은 이미 정치적 영향력을 갖춘 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