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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다리 휘어진 설차례상? 화폐 얼굴 새긴 명문가 예법대로면 [e슐랭 토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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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동육서(魚東肉西), 홍동백서(紅東白西), 조율이시(棗栗梨枾), 좌포우혜(左脯右醯)….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 때 ‘제사상 차리는 법’에 해당하는 사자성어들이다. 각각 상을 차릴 때 ‘물고기는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 ‘과일은 대추·밤·배·감 순으로’, ‘포는 왼쪽에, 식혜는 오른쪽에’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산해진미 한 상 가득 올리는 차례상 차리는 데 수십만원

일반 가정의 명절 차례상. 연합뉴스

일반 가정의 명절 차례상. 연합뉴스

이런 방식에 맞춰 명절 차례상에는 온갖 음식들이 올라간다. 나물이나 전, 산적은 물론이고 생선, 통닭, 떡, 과일이 필수로 올라가고 지역에 따라 문어나 돔배기(상어 고기)를 올리기도 한다. 큰 상에 더는 놓을 음식이 없을 정도로 가짓수가 많다. 올려야 하는 음식 종류만 25~30가지다. 한 번 차례상을 차릴 때마다 40만~50만 원이 깨지는 집도 흔하다.

명절 차례는 어떤 연유로 시작됐을까. 제례문화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는 설날이면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해 간단한 제수를 진설(陳設·음식을 상에 차림)하고 예를 갖추는 일종의 의식으로서 차례를 지낸다고 설명돼 있다. 특히 설날과 추석에는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 않고 차례(茶禮)를 올린다고 했다.

용어사전주자가례

중국 명나라 때에 구준(丘濬)이 가례에 관한 주자의 학설을 수집해 만든 책. 주로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사항을 담았다. 궁궐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지켜야 할 덕목을 잘 정리해 놓았다. 16세기 사림은 예학을 강조해 이 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나타나는 것처럼 ‘산해진미’가 빽빽하게 올라간 차례상은 『주자가례』에 나와 있지 않다.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주자가례』에는 ‘과일을 담은 쟁반 하나와 찻잔과 받침, 술잔과 받침을 각각 진설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세 가지 음식을 차리고 술도 한 번만 올리며 축문도 읽지 않는다는 내용도 눈에 띈다.

경북 안동 퇴계 이황종가 설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경북 안동 퇴계 이황종가 설차례상.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명문가에선 오히려 간소한 차례상

실제 조선시대 공조참의를 지낸 석담(石潭) 이윤우 선생의 경북 칠곡군 석담종가에서도 그 예법을 엿볼 수 있었다. 의관을 정갈히 갖춘 이들이 설을 맞아 차례를 지내는 중 차례상 위 모습이 시선을 끈다. 차례상 위에 전과 떡, 과일 몇 가지와 마른오징어가 전부여서 휑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지난해 추석에 이어 이번에도 차례에 참여한 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전통보다는 방역을 우선한 선택이었다. 제사를 마친 뒤에는 음복을 바로 하지 않고 제수에 쓴 음식들로 도시락을 싸 친척들과 나누기도 했다.

‘상다리 휘어지게’ 차례상을 차리는 일반 가정과 큰 차이를 보인 명문가는 또 있다. 경북 안동시에 위치한 퇴계 이황 종가는 술과 떡국, 북어포, 전, 과일 등 다섯 가지 제수만 차례상에 올린다. 과일 쟁반에는 대추 3개, 밤 5개, 배·감·사과·귤을 각각 1개씩 담는다. 『주자가례』와 비교해서는 차가 생략된 대신 떡국과 전, 북어포를 추가한 상차림이다. 오늘날 화폐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이름을 떨친 학자 집안이지만 차례상은 소박하다.

지난해 2월 12일 설날 경북 칠곡군 석담 이윤우 사당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 4명의 종친만 참석한 가운데 차례를 지내고 있다. 사진 칠곡군

지난해 2월 12일 설날 경북 칠곡군 석담 이윤우 사당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켜 4명의 종친만 참석한 가운데 차례를 지내고 있다. 사진 칠곡군

한국국학진흥원에 따르면 현대 일반 가정의 차례상에는 평균 25~30가지의 제수가 올라가는 것으로 파악됐다. 2017년부터 제례문화의 현대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예서(禮書)와 종가, 일반 가정의 설 차례상 모습을 조사한 결과다. 과일은 종류별로 별도의 제기에 각각 담았으며 그 외 어류와 육류, 삼색 채소, 각종 유과 등이 추가됐다.

역병 땐 차례 생략…“시대 맞게 예법도 변화해야”  

역병이 유행할 때 명절 차례를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경북 예천에 살았던 초간 권문해는 『초간일기』(1582년 2월 15일자)에서 “역병이 번지기 시작해 차례를 행하지 못하니 몹시 미안했다”고 했다. 안동 하회마을의 류의목은 『하와일록』(1798년 8월 14일자)에서 “마마(천연두)가 극성을 부려 마을에서 의논해 추석에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정했다”, 안동 풍산의 김두흠 역시 『일록』(1851년 3월 5일자)에서 “나라에 천연두가 창궐해 차례를 행하지 못했다”고 적었다.

제례문화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는 설날이면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해 간단한 제수를 진설(陳設·음식을 상에 차림)하고 예를 갖추는 일종의 의식으로서 차례를 지낸다고 설명돼 있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제례문화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는 설날이면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조상에게 알리기 위해 간단한 제수를 진설(陳設·음식을 상에 차림)하고 예를 갖추는 일종의 의식으로서 차례를 지낸다고 설명돼 있다.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주자가례』나 종가처럼 술과 떡국, 과일 한 쟁반을 기본으로 차리되, 나머지는 형편에 따라 약간씩 추가해도 예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며 “우리 제례문화도 시대의 변화와 환경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과 같이 전염병이 창궐할 때는 조선시대 선비들처럼 일상의 변화를 통해 차례의 예를 바꿀 필요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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