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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7년전 굴욕 못잊는다…사도광산 밀어붙이는 日 속내 [뉴스원샷]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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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광산 유적 중 하나인 도유(道遊)갱 내부의 모습. 연합뉴스

사도 광산 유적 중 하나인 도유(道遊)갱 내부의 모습. 연합뉴스

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일본의 사도광산 문화유산 등재 시도

일제 강점기 조선인 1200여명이 강제노동에 시달린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려는 일본의 전략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3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하야시 요시마사(林芳正) 일본 외상 간 통화 뒤 일본 외무성은 보도자료를 통해 하야시 외상이 강제징용 및 위안부 피해에 대한 한국의 적절한 대응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또 사도광산과 관련해 한국 측의 독자적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으며, 유감이라고 항의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과거사 현안과 사도광산 문제를 한꺼번에 싸잡아 되레 책임이 한국에 돌리는 공세적 태도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이와 관련, 2018년 10월 대법원이 일본 전범 기업을 대상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한 뒤 일본이 세운 대응 논리는 ‘한국이 약속을 깼다’였다. 한국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다 해결된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양국 간 수교협정을 위반했고, 이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전후 질서 부정이라는 식이었다.

이로 미뤄 사도광산 문제에서도 ‘이미 약속을 어긴 적 있는 한국이 또 강제징용 문제를 꺼내 들어 공연히 훼방을 놓는다’는 식으로 국제여론전을 펼칠 소지가 다분하다.

특히 하야시 외상이 ‘한국 측의 독자적(独自の) 주장’이라는 표현을 쓴 건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의 역사를 ‘사실’이 아닌 ‘일방적 주장’으로 폄훼, 강제노동 자체를 없던 일처럼 취급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사실 이번 사도광산 등재 시도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에게는 각별한 의미가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P=뉴시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AP=뉴시스

2015년 7월 일본은 강제노동 사실을 쏙 뺀 채 나가사키(長崎)시 하시마(端島ㆍ일명 군함도) 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리려 했지만, 강제노동 역사를 인정하고 기록하는 ‘조건부 등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이 끈질기게 외교전을 펼쳤고, 결국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투표까지 갈 경우 충분한 표를 얻을 수 있을지 양쪽 모두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한‧일은 한 발씩 물러섰고, 그렇게 등장한 게 “(일본은)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brought against their will)’ 가혹한 환경 아래서 ‘강제로 노동한(forced to work)’ 사실이 있음을 인식한다”는 표현이었다.

물론 일본은 등재 직후 해당 표현이 ‘강제노동(enforced work)’은 아니라고 부정하며 국내 여론을 달랬지만, 맥락상 사실상의 시인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 중앙 포토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 중앙 포토

당시 외교 협상을 맡았던 외무성을 이끈 외상이 바로 기시다 총리였다. 강제노동 인정이 아니라고 가장 먼저 나서 부정한 각료도 그였다.

일본 정부는 등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랬을 리 없다. 실제 이 일로 아베 신조(安倍晋三) 당시 총리가 외교 라인에 크게 실망했고, 외무성에서 한국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당국자가 다음 공관장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소문이 외교가에 파다하게 퍼지기도 했다.

이번에 사도광산 등재 신청을 결정하기까지 자민당 강경파들의 압박 등 집안 사정이 어찌 됐든, 기시다 총리에게는 ‘리턴 매치’가 될 수 있는 셈이다.

일본 정부가 해볼 만 하다고 여기는 데는 이유가 또 있다. 사도광산은 군함도와 달리 조선인 외에 다른 국적자들은 강제동원되지 않았기에 한국이 연대할 피해국들이 없다. 또 사도광산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기업이 만든 당시의 노동자 명부도 확보되지 않았다. 사료가 충분치는 않다는 뜻이다.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 현장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을 강행한 지난달 28일 밤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일본대사가 초치되고 있다. 뉴스1

일본 정부가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 현장인 사도광산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천을 강행한 지난달 28일 밤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로 아이보시 고이치 주한일본대사가 초치되고 있다. 뉴스1

2015년 군함도 때는 등재 여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유네스코 자문기구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등재를 권고하면서도 군함도의 ‘전체 역사(full history)’를 기록하라고 한 게 결정적 한 방이었다. 일본이 등재 기간을 1850~1910년으로 한정하려고 한 데 대해 ‘1940년대 강제동원 사실도 모두 알리라’고 반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사도광산 등재 시도와 관련한 정부 대응에서도 유네스코가 당시와 같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강제노동 관련 근거를 충분히 제공하는 게 관건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일본은 강제노동을 입증할 공식적 증거가 없다며 이를 역공의 지점으로 삼을 게 뻔하다. 벌써부터 강제노동 사실을 한국의 일방적 주장처럼 몰아가는 게 그 전초전이다.

정부가 민‧관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총력전을 다짐한 만큼 민간 연구자들이 그간 축적해놓은 결과물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2019년 12월 나온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용역 보고서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미쓰비시 광업 사도광산을 중심으로’는 사도시 사도박물관이 1980년 초에 수집한 ‘조선인 연초(담배) 배급명부’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91년 11월 아사히 신문도 기사화한 것으로 돼 있다. 여기 수록된 조선인만 463명이며, 242명은 이름과 생년월일 등이 나와 있다.

사도광산의 '조선인 연초배급 명부' 사본.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미쓰비시 광업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보고서 캡처

사도광산의 '조선인 연초배급 명부' 사본. ‘일본 지역 탄광.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실태-미쓰비시 광업 사도광산을 중심으로’ 보고서 캡처

보고서에 따르면 사도광산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어민 등 지역 주민의 도움을 받아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보고서는 “이는 서류에 ‘퇴사’가 아닌 ‘도주’로 기재됐다.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인신적 구속, 강제적 상태에 놓여 있음을 의미하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광산 측이 마련한 탈출 방지 대책에는 ‘도망 중개자 엄벌’ ‘(주민들에게)반도 노무자에 대한 값싼 동정심을 근절시킬 것’ ‘부랑 반도인(조선인) 사용금지’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탈출에 실패한 조선인들은 가혹한 폭행에 시달렸음은 물론이다.

글로 읽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오는 기록이지만, 하나하나가 조선인 강제노동의 증거다. 이런 숨막힘을 국제사회가 그대로 공감하도록 만드는 게 정부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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