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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법원 가처분 정국’ 자초한 무능한 정치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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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국민의당 당원들과 안철수 대선 후보 지지자들이 20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기득권 야합 불공정 TV토론 규탄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국민의당 당원들과 안철수 대선 후보 지지자들이 20일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기득권 야합 불공정 TV토론 규탄대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스1

양자 TV토론 법원이 제동, 다른 가처분도 쇄도  

대선 룰도 못 정하는 건 타협·조율 사라진 때문

서울서부지법이 오는 30일이나 31일로 예정됐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간 양자 TV토론에 제동을 걸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 측이 낸 방송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방송 일자가 대선까지 40일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고, 최대 명절인 설 연휴여서 양자 토론회가 미치는 영향이 지대할 것”이라며 참여하지 못하는 후보는 군소 후보라는 이미지를 안아 불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두 후보만의 TV토론은 애초에 무리한 설정이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이번 양자 TV토론이 위법은 아니었다. 공직선거법은 법정 토론회 초청 대상을 5인 이상 국회 의석을 가진 정당, 직전 선거에서 전국 3% 이상 득표한 정당, 여론조사에서 평균 5% 이상 지지율을 보인 후보로 정하고 있다. 언론사 주관 토론회는 이 규정을 지킬 의무가 없고, 다수가 참여하는 토론은 자칫 겉핥기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법원의 판단이 나온 만큼 각 정당은 다수 후보가 참여하는 토론을 서둘러 조율해 국민에게 판단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정치권은 이번에 무슨 일만 있으면 사법부로 달려가는 양상을 또 노출했다. 대선을 앞둔 후보 TV토론은 그야말로 각 정당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후보별 지지율이 변화를 보이는 만큼 방송사와 각 후보 측이 법정토론회 기준을 참고로 상식선에서 조율했으면 된다. 그런데도 이해타산에 따라 계산기만 두드리다 결국 자율로 정해도 되는 TV토론 방식마저 판사가 가르마를 타주는 상황이 됐다.

‘가처분 정국’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정치권이 사법부의 결정에 의존하는 경향은 심해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재명 후보와 친형 사이의 갈등을 다룬 책의 판매·배포를 금지해 달라며 낸 가처분 신청은 법원에서 기각됐다. 국민의힘이 윤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7시간 녹취록’ 보도를 금지해 달라며 MBC를 상대로 낸 가처분에 대해 서울서부지법은 일부를 인용했다. 이와 달리 국민의힘이 온라인 매체들을 상대로 낸 가처분 신청에서 서울중앙지법과 서울남부지법은 MBC보다 더 넓게 방영하도록 허용했다. 정치권이 워낙 자주 법원 문을 두드리니 법원마다 다른 결정을 내리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은 의아할 지경이다.

1987년 헌법재판 제도가 도입되면서 정치에 사법의 영향이 미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정치의 사법화는 극심한 대립으로 이견을 해소하지 못하고 정책 타협도 불가능해진 정치권의 현주소를 드러내고 있다. 국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점을 찾는 게 정치권의 존재 이유다. 특히 이번 대선에선 후보 관련 의혹이 많아 고소·고발전이 빈발하고 네거티브 전쟁이 법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치권은 삼권분립을 위협하는 후진적 행태를 그만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