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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닉슨 4년 만에 재회, 세계 언론 정치적 해석 분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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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2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12〉

1976년 2월, 중국은 민간인 닉슨을 국가원수로 예우했다. 마오쩌둥 접견도 포드보다 10분 길었다. 2월 24일 칭화(淸華)대학을 방문, 학생들과 담소하는 닉슨. [사진 김명호]

1976년 2월, 중국은 민간인 닉슨을 국가원수로 예우했다. 마오쩌둥 접견도 포드보다 10분 길었다. 2월 24일 칭화(淸華)대학을 방문, 학생들과 담소하는 닉슨. [사진 김명호]

1972년 2월 28일 닉슨과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서명한 ‘상하이공동성명’의 핵심은 대만 문제였다.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한다. 대만은 중국의 일부분이다. 대만해방은 중국의 내정문제다. 다른 나라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 닉슨은 구두로 “연임에 성공하면 임기 내에 양국관계 정상화와 대만에 주둔하는 미군과 군사시설의 철수”도 확약했다.

닉슨의 중국방문 2개월 후 중국 핑퐁선수단이 미국을 방문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미국에 중국 바람이 불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의 잡기(雜技)를 동방의 기적이라 소개한 후, 서구인들은 온갖 묘기 연출하는 중국 잡기에 호기심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1972년 가을, 잡기대표단 52명이 시카고에 도착했다. 인민복 차림에 근엄한 교사를 연상케 하는 잡기단의 고난도 묘기에 미국인들은 넋을 잃었다. 사탕과 꽃을 무대로 던지고, 잡기단은 수(繡)놓은 실크 손수건을 관객들에게 뿌렸다. 뉴욕과 워싱턴에서도 연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당시 잡기단이 들고 온 짐 5t 중 반 이상이 관객들에게 줄 선물이었다.

중 핑퐁선수단·잡기단 미서 인기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 이후, 미국에 원정 온 중국 핑퐁 대표단과 미국 선수와의 친선 경기에서 중국 선수를 응원하는 미국 관중. [사진 김명호]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의 중국방문 이후, 미국에 원정 온 중국 핑퐁 대표단과 미국 선수와의 친선 경기에서 중국 선수를 응원하는 미국 관중. [사진 김명호]

미국 언론인들의 중국방문과 학술교류도 꿈틀거렸다. 중국의 대학에는 1949년 이전에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들이 많았다. 옛 지도교수, 동료들과 서신 왕래가 시작됐다. 학자들의 자유왕래와 학생 교환을 은밀히 타진했다. 정식 수교가 안 되고 문혁이 진행 중이다 보니 실현은 요원했다. 미국의 중국 관련 연구자들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닉슨이 큰소리친 양국 수교가 지지부진한 이유가 있었다. 재선에 성공한 닉슨과 후임자 포드는 국가 이익에 충실했다. 중국과의 관계개선과 동시에 소련과의 관계완화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73년에 들어서자 저우언라이는 강경파에게 힘이 달렸다. 말만 총리지 실권은 상실한 허깨비였다. 몸 안에서 암세포가 기승을 부리고, 눈만 뜨면 미국의 양다리에 놀아났다며 비난이 빗발쳤다. 마오가 직접 나섰다. 포드 대통령의 중국방문 2개월 후인 1976년 2월 초, 워싱턴에 주재하는 중국연락사무소 소장 황쩐(黃鎭·황진)에게 지시했다. “닉슨을 초청하고 싶다. 직접 새크라멘토에 가서 내 뜻을 전해라.” 닉슨이 마다할 리가 없었다.

2월 6일, 신화(新華)통신의 발표에 미국이 술렁거렸다. “1972년 2월 21일, 미합중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방문과 연합성명 발표는 중·미관계 개선에 중대한 작용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76년 2월 21일, 닉슨 방문 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닉슨 선생과 부인을 초청했다. 닉슨 선생 부부도 흔쾌히 수락했다.” 세계의 주목을 받고도 남을 뉴스였다. 의론이 분분했다. “포드 대통령이 1975년 12월 1일부터 5일까지 중국을 방문했다. 1개월 후 중국외교를 전담하던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사경을 헤매던 저우를 대신해 포드를 영접했던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도 자취를 감췄다. 다시 실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 와중에 전 대통령 닉슨을 초청한 중국 정부의 속내를 이해하기 힘들다.”

1976년 2월 21일 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닉슨 부부, 왼쪽 끝이 마오쩌둥의 지시로 마중 나온 총리대리 화궈펑. [사진 김명호]

1976년 2월 21일 밤, 베이징 공항에 도착한 닉슨 부부, 왼쪽 끝이 마오쩌둥의 지시로 마중 나온 총리대리 화궈펑. [사진 김명호]

2월 17일 밤, NBC의 평론이 주목을 끌었다. “워싱턴에 추측의 유희가 벌어졌다. 이번 주말 닉슨이 중국으로 떠난다. 대선을 9개월 앞둔 포드의 백악관은 불편한 기색이다. 닉슨은 민간인이다. 중국방문이 정치적 의미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중국은 대규모 미국기자단의 방문 취재도 허용했다. 포드의 닉슨 사면 비난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중국인은 워터게이트 추문을 이해하지 못한다. 닉슨이 다시는 미국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다. 닉슨은 말이 없고 중국도 입을 닫았다.”

ABC는 전 유엔대사 존 스컬리를 초빙, 닉슨의 사유지 새크라멘토에 가서 마이크를 잡게 했다. “며칠 후 전 대통령 닉슨의 독특한 중국여행이 시작된다. 이번 방문은 사직 후 18개월간 이곳에 은거하던 닉슨이 다시 세계 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닉슨은 뉴햄프셔주 예선 3일 전인 2월 21일, 4년 전 베이징에 도착했던 바로 그 날, 중국이 보낸 전세기로 중국 땅을 밟게 된다. 그때 체류했던 숙소에 묵으며 마오쩌둥 주석을 예방할 예정이다. 무슨 대화 나눌지 세계의 언론매체가 뉴햄프셔보다 베이징을 더 주목한다.”

영국의 더타임스는 중국의 닉슨 초청을 1면에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국제관례를 초월한 파격이다. 중국은 지난 2년간 미국의 대중관계 부진에 실망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보다 모스크바를 중요시 여긴다는 생각이 강하다. 포드 방문 이후 닉슨을 초청한 것은 워싱턴의 정책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다.”

마오, 닉슨과 재회 7개월 뒤 사망

2월 21일 밤, 닉슨 부부가 탑승한 중국 전용기가 베이징에 도착했다. 미국의 20여 개 언론사 기자와 중국에 상주하는 외국 기자들로 공항이 북적거렸다. 총리대리 화궈펑(華國鋒·화국봉)과 외교부장 차오관화(喬冠華·교관화)와 각계 인사 350여 명의 요란한 박수와 함성에 묻힌 닉슨은 감개가 무량했다.

22일 새벽, UPI가 미국의 중국연락사무소 소장을 역임한 CIA국장 부시의 소감을 타전했다. “중국 재직 14개월간 닉슨 대통령은 중국의 친구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닉슨은 중국인들에게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인물이다.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나고, 복권됐던 덩샤오핑은 다시 타도됐다. 화궈펑의 총리 기용도 의외였다. 닉슨 부부의 중국 초청이라는, 아무도 생각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사람은 마오쩌둥 외에는 없다.”

닉슨의 2차 중국방문 7개월 후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마오 사망 2개월 후에 미국 대선이 열렸다. 모든 조건이 우세했던 포드는 미·중수교와 동북아의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카터에게 패했다.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끝까지 참여했던 슝샹후이(熊向暉·웅향휘)는 단정했다. “카터의 당선은 주석의 닉슨 초청과 유관(有關)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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