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 살 지구, 우리가 지켜야" 한국판 '그레이 그린' 나섰다

중앙일보

입력 2022.01.19 17:29

60대 이상 시니어들의 기후위기 비상행동 모임인 '60+기후행동' 관계자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발대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60대 이상 시니어들의 기후위기 비상행동 모임인 '60+기후행동' 관계자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발대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희끗한 머리 위로 하얀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졌다. 영하 추위에 말을 할 때마다 하얀 입김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손주가 살아갈 지구를 지키자'는 이들의 열기는 거리에 쌓인 눈을 녹일 만큼 뜨거웠다.

19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 노년층 50여명이 모였다. 대개는 무료급식 등을 받기 위해 찾는 장소지만, 이날만큼은 달랐다. '우리가 달라져야' '지구 살려' 등의 피켓 속에 선 이들은 60+기후행동의 출범을 선언했다. 60+기후행동은 60대 이상 '실버 세대'부터 기후 변화에 적극 대응하자는 뜻을 담은 환경단체다. 다 같이 선언문을 읽자 손뼉이 터져 나왔다.

대설특보가 내려질 만큼 궂은 날씨였지만 예정된 행사는 그대로 열렸다. 긴급 출동을 알리는 '119'(1월 19일)의 상징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박승옥(69) 60+기후행동 공동운영위원장은 "긴급한 기후위기 상황을 알리고 헤쳐나가는데 우리 노년층이 힘을 합치고 싶다"고 말했다.

'60+기후행동' 관계자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발대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60+기후행동' 관계자들이 19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발대식을 진행하고 있다. 뉴스1

한국판 '그레이 그린'(Grey Green)이 공식 출범했다. 국내 노년층이 주도한 60+기후행동은 이날부터 본격적인 환경 운동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처음 등장한 용어인 그레이 그린은 환경 운동을 주도하는 노인들을 일컫는다.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유럽·미국 노인들이 기후 관련 집회에 활발히 참여하는 모습을 보고 언론에서 붙였다. 특히 영국 런던의 그레이 그린이 '내 손주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체포돼도 좋다'는 피켓을 들어 화제가 됐다. 이 운동이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날 출범식엔 윤정숙(64) 공동운영위원장, 안재웅(82) 한국YMCA전국연맹 이사장, 이경희(75) 환경정의 이사장 등이 나왔다. 실버 세대 환경운동가인 이들은 한국판 그레이 그린 운동을 주도했다. 앞서 지난해 '노인들이 환경 운동에 앞장서자'는 내용의 문서에 먼저 서명했다. 기성 세대가 많은 걸 누렸지만, 사회에 도움이 될 기회가 적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했다고 한다. 행사에 다 참석하진 못했지만, 뜻을 함께한 동료들도 700명 넘게 모였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 기후 행동을 촉구하는 피켓이 놓였다. 편광현 기자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 기후 행동을 촉구하는 피켓이 놓였다. 편광현 기자

이번 출범식에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 계획도 발표됐다. 60+기후행동은 기후위기의 1차 책임이 대기업과 국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100개 대기업·공기업에서 배출하는 이산화탄소가 국내 배출량 전체의 90%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윤정숙 위원장은 "국민 개개인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가 바뀌어야 기후 재앙을 극복할 수 있다. 앞으로 기업과 정부를 찾아가 우리 의견을 전하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첫 번째로 나설 활동은 석탄화력발전소 반대다. 석탄 화력발전에 투자하는 국내외 연기금, 은행들에 "앞으로 손해 볼 좌초자산에 투자하지 말라"는 편지와 이메일을 보내기로 했다. 석탄화력발전소를 운영하는 기업 총수들에게도 면담을 신청할 예정이다.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내부에 눈이 쌓인 모습. 편광현 기자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내부에 눈이 쌓인 모습. 편광현 기자

이런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119 기후행동대'도 만든다. 1월 19일 출범식을 가진 119명의 노인들이 모여 직접 행동한다는 의미다. 다만 이들은 폭력적 시위 방식을 배제하기로 했다. 주요 집회 장소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니기', '산책 시위' 등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할 예정이다. 큰 소리조차 내지 않는다고 해서 '60+ 웅성웅성 기후행동'이란 별칭도 붙였다.

윤정숙 위원장은 "우리 노년층은 손주 세대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줄 수는 없다고 결심했다. 우리가 지나온 삶이 모두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풍요와 편리를 누린 우리의 반성을 기후 재앙을 막는 에너지로 삼고자 한다"고 했다.

60+기후행동의 시작을 탑골공원에서 알린 것도 노인에 대한 세간의 인식을 깨기 위해서다. 박승옥 위원장은 "자주와 독립을 외치던 공간이 사회에서 소외된 노년들의 공간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앞장서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노년들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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