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까지 공부, 아무도 가지 않은 길 개척 ‘탁월한 산꾼’

중앙선데이

입력 2022.01.15 00:02

업데이트 2022.01.1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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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1호 25면

[죽은 철인의 사회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등정 김창호 대장

김창호 대장이 2012년 네팔 힘중(7140m) 등정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뒤 환호하고 있다. [중앙포토]

김창호 대장이 2012년 네팔 힘중(7140m) 등정에 세계 최초로 성공한 뒤 환호하고 있다. [중앙포토]

‘집에서 집으로.’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무산소로 등정한 고(故) 김창호(1969~2018) 대장의 모토였다. 고산 등반의 성공은 집에서 출발해 목표를 달성한 뒤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것까지라는 뜻이다.

김 대장은 ‘1%의 가능성만 있어도 밀어붙인다’는 식의 등정을 싫어했다. 2016년 중앙SUNDAY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정을 앞두고는 눈사태나 낙석, 식량 고갈, 동료의 부상 등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어떤 극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잘 돌아올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출발해야 한다. 베이스캠프까지 날아가서 정상을 바라볼 때 느낌이 딱 온다. 안 되겠구나 싶으면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한다.”

무장 탈레반에 잡혀 총살 위기 맞기도

경기도 양주시 가래비빙벽장에서 훈련 중인 김창호 대장. [사진 주민욱]

경기도 양주시 가래비빙벽장에서 훈련 중인 김창호 대장. [사진 주민욱]

그랬던 김창호 대장이 2018년 네팔 구르자히말 원정에서 사고로 숨지자 산악계는 충격에 빠졌다. 김 대장이 이끈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 전원이 희생된 이 사고는 네팔 현지인들도 “믿을 수 없다”고 고개를 저을 만큼 예외적이고 미스터리한 참사였다.

2018년 10월 12일 원정대는 구르자히말(7193m)에 신루트를 개척하기 위해 35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정상 등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 대장과 유영직(장비 담당), 이재훈(식량·의료 담당), 임일진(다큐영화 감독) 대원, 현지에 격려차 합류한 정준모 한국산악회 이사가 모여 있던 베이스캠프에 그날 밤 엄청난 돌풍이 몰아쳤다. 이들은 텐트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 네팔인 현지 가이드 4명도 함께 희생됐다.

다행히 시신이 수습돼 한국으로 이송됐고, 19일 합동 영결식이 열렸다. 김 대장은 2011년 작고한 고(故) 박영석·김형일 대장과 더불어 알파인 스타일을 고수한 산꾼이었다. 알파인 스타일이란 셰르파(히말라야 고산 가이드)의 도움 없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 단번에 치고 가는 방식이다.

김창호 대장은 ‘문무를 겸비한 산악인’으로 통했다. 해병대 시절 3분30초 잠수 기록을 세울 정도로 체력과 심폐기능이 좋았고, 고산 등반에 관한 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보유한 산악인으로 꼽혔다.

김 대장의 결혼식 주례를 맡았던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은 “창호는 호기심과 학구열이 높고,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사람이었다. 처음 가 보는 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꼭 마을 촌장을 찾아 뵙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라고 인사를 하는 친구였다”고 회고했다.

김창호 대장의 모교인 서울시립대에서 열린 합동영결식. 왼쪽부터 이재훈·임일진·김창호·유영직·정준모 대원. [중앙포토]

김창호 대장의 모교인 서울시립대에서 열린 합동영결식. 왼쪽부터 이재훈·임일진·김창호·유영직·정준모 대원. [중앙포토]

김 대장은 2013년 아시아 최초 8000m 14좌 무산소 완등으로 ‘산악 영웅’의 길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코리안 웨이’라는 자신만의 길을 택했다. 산의 높이에 집착하지 않고 알파인 스타일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했다. 바로 신루트 등반이었다. 2016년 강가푸르나(7455m) 남벽에 이어 2017년 인도 다람수라(6446m)·팝수라(6451m) 남벽에 신루트를 냈다.

그는 히말라야가 좋아 그곳에서 5년을 살았다. 홀로 2년 동안 파키스탄 카라코람 빙하를 탐사하며 히든 크레바스(보이지 않는 빙하 속 틈)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긴 장대를 양손에 쥐고 걸었다고 한다. 히말라야에서 무장 탈레반에게 잡혀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그는 “세 명이 권총을 겨냥했는데, 난 누가 내 머리에 총을 쏠 건지 알았다. 그 놈의 총구와 눈만 보이더라. 결국 그 놈이 내 머리를 향해 총을 쐈다. 본능이란 게 이렇게 무서운 거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총알이 빗나가 그는 목숨을 건졌다.

당시 사고 상황을 되짚어보자. 현지에서 사고를 수습한 최홍건 전 한국산악회 회장은 “텐트는 베이스캠프에서 1㎞ 떨어진 지점의 나무에 걸려 있었고, 시신과 유품은 캠프에서 수백m에 걸쳐 흩어져 있었다. 하지만 산사태나 눈사태의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고 원인을 바람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베테랑 산악인들은 “눈사태나 산사태로 인한 후폭풍이 베이스캠프를 덮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안나푸르나 등반 중 베이스캠프에서 눈사태로 인한 후폭풍을 경험한 김재수 대장은 “무중력 상태처럼 몸이 붕 떴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며 퉁퉁 튕겨져 나간다. 당시에 70m를 날아갔다”고 증언했다.

2019년 유족들과 함께 현지에 위령탑을 세우고 온 김영주 중앙일보 기자는 당시 시신을 수습했던 현지 가이드를 취재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그 지역에서 자주 발생하는 지진에 의해 산사태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발생한 초강력 후폭풍이 베이스캠프를 덮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한다.

‘김창호 정신’ 기리는 기념사업회 태동

사고 1주기를 맞아 유족들이 구르자히말 현장에 세운 위령탑. [사진 김영주]

사고 1주기를 맞아 유족들이 구르자히말 현장에 세운 위령탑. [사진 김영주]

김 대장과 친형제 못지않은 정을 나눴던 서기석 유라시아트랙 대표는 그를 ‘탁월한 산꾼’으로 기억했다. “창호는 산에 대해 접근하는 것 자체가 다층적이고 창의적이었다. 등정하려는 산과 주변 지형에 대한 꼼꼼한 조사는 기본이고, 산과 그 동네 이름에 얽힌 스토리, 그 지역에 자생하는 야생화에 대해서도 공부할 정도였다.” 서 대표는 ‘김창호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월간 산’ 편집장 출신인 한필석 씨는 김 대장을 구르자히말로 보낼 때 느낌이 너무 안 좋아 “늦장가 가서 본 딸내미가 얼마나 귀하냐. 그러니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말고 귀국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한 씨는 “김 대장은 발이 빠르고 힘도 장사였다. 빙하를 탐사할 땐 40㎏이 넘는 배낭을 하루 종일 메고 다녔는데 카메라 장비 무게만 10㎏에 달했다. 꼼꼼하게 사진 찍고, 기록하고, 외국 자료도 누구보다 열심히 챙겼다. 김 대장은 등반을 인문학적으로 접근하고, 이를 글로 풀어낼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며 그를 ‘도전정신과 심미안을 겸비한 산악인’으로 기억했다.

히말라야 8000m급 거봉을 트레킹 하듯 다녀오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고산에 오르고 새 루트를 내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김 대장의 생전 육성에 힌트가 있을 듯싶다.

“이제 고산 등반은 기록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내가 어떤 루트를, 어떤 방식으로 올랐나,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산에 대한 존중과 자기 책임, 그리고 안전이 화두가 되고 있다. 내가 산에 가는 이유는? 다른 어떤 행위에서도 얻을 수 없는, 존재의 충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30년 친구 임일진 영상감독, 원정 직전 합류했다가 함께 떠나
구르자히말 원정대 임일진·김창호·이재훈·유영직 대원(왼쪽부터). [중앙포토]

구르자히말 원정대 임일진·김창호·이재훈·유영직 대원(왼쪽부터). [중앙포토]

김창호 대장과 함께 사고를 당한 임일진(당시 49세·한국외대 산악부 OB) 감독은 클라이머이자 산악 다큐멘터리 제작자였다. 2013년 김 대장과 함께한 에베레스트 원정에서 카메라를 들고 캠프4(8000m)까지 올랐고 캠프 매니저 역할까지 겸했다. 다큐 감독으로선 2008년 ‘벽’으로 아시아 최초 이탈리아 트렌토국제산악영화제 특별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임 감독은 작품을 통해 산악계의 아픈 곳을 꼬집기도 했다. 2016년 울주산악영화제 개막작으로 선보인 ‘알피니스트’가 대표적이다. 영화는 정상 등정의 환희 뒤에 숨은 이면을 들춘다. 임 감독의 말이다.

“일부 산악인은 시시때때로 히말라야에 찬사를 보내고 경외를 표하고, 신격화한다. 그러다가 스스로 경외의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대중은 영웅이 된 산악인에 경배를 표한다. 우리 스스로 만든 허상이다.”

김 대장과 임 감독은 1988년 서울시립대와 한국외대 산악부 신입생 시절에 처음 만나 전 세계 산을 함께 누빈 30년 지기다. 임 감독은 원래 원정대원에 포함돼 있지 않았지만, ‘산악 다큐영화 후원’이 들어와서 출발 직전에 합류했다고 한다. 그렇게 두 친구는 한날한시에 히말라야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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