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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공 다루기 연습 평생 실천, 일흔 넘어서도 축구 묘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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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25면

[죽은 철인의 사회] 한국 축구의 아버지 김용식 선생

1961년 6월 11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과의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김용식 감독(오른쪽 셋째)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61년 6월 11일 도쿄에서 열린 일본과의 칠레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김용식 감독(오른쪽 셋째)이 작전 지시를 하고 있다.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김용식 선생(1910~1985)은 한국 축구의 아버지다. 그는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수많은 ‘최초’ 기록을 세우며 한국 축구의 길을 낸 선구자다. 그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해 3경기를 뛰었고, 태극기를 달고 1948년 런던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김 선생은 2005년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2016년에는 일본 축구의 전당에도 올랐다.

김용식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익두 목사는 유명한 깡패에서 회심해 성직자가 된 초기 개신교계 큰 별이었다. 신사참배 거부로 모진 고문을 당했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총에 맞아 순교했다.

소년 김용식도 싸움을 잘 했고, 강인한 승부욕과 집념의 소유자였다. 축구선수로서 대성하겠다는 결심을 한 18세부터 술과 담배,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했고 그 약속을 눈을 감을 때까지 지켰다.

‘축구천재’ 김영근과는 중학 시절 한 집에서 살며 경쟁 속에 우애와 실력을 쌓았다. 1대1 시합을 붙으면 해가 져서 공이 안 보일 때까지 했고, 페널티킥은 크로스바 위에 사발을 올려놓고 그걸 맞히는 방식으로 했다. 그만큼 기술 향상에 노력했다.

크로스바 위에 사발 놓고 페널티킥 연습

1973년 11월 물구나무 서서 묘기를 보여주는 김용식 선생.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73년 11월 물구나무 서서 묘기를 보여주는 김용식 선생.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베를린 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축구협회는 조선 선수로는 김영근과 김용식만 대표팀에 뽑았다. 조선 선수들의 기량이 훨씬 뛰어났으나 선발 기준을 바꿔가면서 대놓고 차별을 했다. 격분한 여운형 조선축구협회장은 두 선수에게 올림픽에 참가하지 말 것을 종용했다.

김영근은 조선 선수를 미워하고 구식 축구를 고집하는 일본인 코치를 목욕탕에서 물바가지로 두들겨 팬 뒤 팀을 나와 버린다. 홀로 남은 김용식은 고민 끝에 베를린 행을 결심한다. ‘선진 축구를 배워 와 후진 양성에 앞장서겠다’는 게 그의 각오였다. 실제로 올림픽 출전은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지도자로서 안목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김영근에게 맞았던 일본인 코치는 김용식도 괴롭혔다. 베를린에 도착한 뒤 독일 팀들과 연습경기에서 한 번도 기용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김용식은 그를 찾아가 “왜 민족차별을 하느냐. 계속 이런 식이라면 당장 귀국할 테니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따졌다. 기세에 눌린 코치는 김용식을 주전으로 기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스웨덴전에서 일본은 전반 두 골을 내줬으나 후반 두 골을 따라붙었고, 김용식이 20m 드리블 돌파 후 찔러준 패스가 골로 연결돼 3-2 역전승을 거뒀다.

김용식은 빙상 선수로 올림픽에 출전할 뻔했다. 열두 살 때 형의 스케이트를 물려받아 빙판을 누빈 그는 1935년 전조선 빙상대회 3관왕에 올랐고, 중국 봉천에서 열린 전만주 빙상대회에서도 2종목 우승을 차지했다.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 출전하러 일본에 가서 대회 사흘을 앞두고 너무 많은 훈련을 해 다리가 뭉치는 바람에 탈락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여러 학교를 옮겨 다닌 김용식은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를 졸업했다. 선교사에게서 배운 영어 실력은 후일 국제축구연맹(FIFA) 등의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가할 수 있게 해 주었고, FIFA 국제심판 자격증을 따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보성전문 다닐 때 에피소드가 있다. 전일본축구선수권 준결승에서 와세다대학을 만나 연장까지 승부가 나지 않아 추첨을 하게 됐다. 와세다 주장이 먼저 봉투를 열더니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승리를 확신한 보전 주장 김용식이 봉투를 열었더니 웬걸 ‘패(敗)’자가 쓰인 종이가 나왔다. 김용식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에 주심은 재빨리 와세다의 승리를 선언했다. 나중에야 봉투 두 장에 모두 ‘패’를 써 넣은 주최측의 조작임을 알게 됐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김용식은 코치 겸 선수로 출전했다. ‘대한민국’ 국호를 달고 출전한 올림픽 무대에서 멕시코에 첫 승리(5-3)를 거뒀으나 스웨덴에 0-12로 참패했다. 선수 선발 과정의 내분으로 팀이 갈가리 찢어졌기 때문이다.

빙상 선수로 올림픽 출전 도전도

김용식 선생이 생전에 쓴 ‘축구선수가 되는 요소’ 메모.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김용식 선생이 생전에 쓴 ‘축구선수가 되는 요소’ 메모.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김 선생은 1951년 한국 최초로 FIFA 국제심판 자격을 획득했고, 42세이던 1952년 은퇴했다. 축구 선수는 40세 이상 현역 생활을 해야 한다며 공 다루는 연습을 하루도 빠짐없이 1만일을 하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일흔을 넘겨서도 대중 앞에서 공 다루는 묘기를 보여줄  정도였다.

김용식 선생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감독으로 참가했다. 한국전쟁 종전 직후라 모든 게 궁핍했던 시절, 월드컵에 첫 출전한 대표선수들은 미군 군용기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 해 첫 경기 이틀 전 밤에야 현지에 도착했다.

세계 최강 헝가리에 0-9로 참패한 뒤 김용식 감독은 터키와의 2차전에 2진 선수들을 대거 기용했다. 평소 1진과 2진을 엄격히 구분해 운영한 김 감독의 용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선수 구성이었다. 덕분에 20명 중 두 명만 빼고 모두 월드컵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터키에 0-7로 졌지만 김 감독은 자신이 베를린과 런던 올림픽에서 경험한 ‘세계 정상 축구’를 선수들이 직접 느껴보기를 바랐다.

당시 대한민국 선수단은 월드컵 입장 수입의 일부를 출전국에 분배하는 사실조차 몰랐다. 스위스 월드컵 조직위는 터키와의 경기가 끝난 뒤 한국 선수단 숙소로 ‘경기 배당금 8400달러를 받아가라’고 통보했으나, 선수단은 이미 스위스를 떠난 뒤였다.

1960년 서울에서 열린 제 2회 아시안컵 우승 감독도 김용식이었다. 그 이후 한국은 아시안컵에서 60년이 넘도록 우승컵을 가져오지 못했다. 1980년에는 국내 1호 프로 팀인 할렐루야 감독으로 부임했다.

김 선생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의 광릉추모공원에 있다. 자녀들이 모두 미국에 살고 있어 찾는 이가 거의 없고 관리도 제대로 안 되고 있다.  축구자료수집가 이재형 씨는 “월드컵 9회 연속 진출에 빛나는 한국 축구의 여명기를 개척한 김용식 선생이 남긴 자료를 잘 보존하고 그의 정신을 기릴 공간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선생 묘비에 새겨진 추모 글귀다. ‘한 사람이 진실로 최선을 다한다면 얼마나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는가를 당신은 몸소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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