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견디기 힘든 고통”...日 총리 최초로 ‘식민지 지배 사죄’ [가이후 도시키 1931~2022.1.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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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해 한국에 '사죄'의 뜻을 밝혔던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전 총리가 별세했다. 향년 91세.

1991년 한국을 방문한 가이후 도시키(왼쪽) 일본 총리가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1년 한국을 방문한 가이후 도시키(왼쪽) 일본 총리가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가이후 전 총리는 1989년 8월부터 1991년 11월까지 2년 3개월간 일본 총리를 지냈다. 1990년 5월 24일 일본을 방문한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나는 대통령 각하를 맞이한 이 기회에, 과거의 한 시기, 한반도의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의 행위에 의해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슬픔을 체험하신 것에 대해 겸허히 반성하며 솔직히 사죄(お詫び)하는 마음을 표명하고자 한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회담 후 이어진 만찬에서 아키히토(明仁) 당시 일왕이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이 불행했던 시기에 귀국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여 본인은 통석(痛惜·매우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김)의 염(念·생각)을 금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과 더불어 큰 주목을 받았다.

가이후 총리의 사과는 앞선 일본 총리들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잘못'이나 '유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보다 한 걸음 더 나간 것이었다. 1983년 1월 11일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1918∼2019) 당시 총리는 만찬에서 "한·일 양국 간에 유감스럽게도 과거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우리는 이를 엄숙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자위대 첫 해외파견 결정도

가이후 전 총리는 1931년 나고야(名古屋)시 출생으로 와세다(早稲田)대학을 졸업했다. 1960년 당시 최연소로 중의원에 당선돼 16선 의원을 지냈다.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내각에서 관방부장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문부과학상을 역임했다.

총리 퇴임 후인 1994년 한국을 찾은 가이후 전 총리가 청와대를 방문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총리 퇴임 후인 1994년 한국을 찾은 가이후 전 총리가 청와대를 방문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총리 재임 중이던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의 강한 요청에도 자위대 파견에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헌법상 군대 파견은 불가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미국 중심의 대(對) 이라크 다국적군에 130억 달러의 자금 제공을 결정하는 데 그쳤다.

전쟁이 끝난 후 기계수뢰를 제거하는 활동을 위해 해상자위대 소해정을 페르시아만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자위대 창설 이래 첫 해외 임무 참여였다. 이는 자위대의 국제평화유지활동(PKO) 참가로 이어졌다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전했다.

물방울무늬 넥타이가 트레이드 마크로 스캔들이 없는 깨끗한 이미지로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 총리 퇴임 후에는 '정치 개혁'을 내세우며 자민당에서 탈당해 야당 신진당의 초대 당수를 지냈다. 2003년 11월 자민당에 복당했으나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는 가이후 전 총리에 대해 NHK 방송에 "과거 자민당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총재로 취임해 선거에서 승리, 자민당 정권을 유지한 큰 공적이 있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자위대의 국제공헌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보낸다'는 결단을 내렸다. 거듭 진심으로 공적을 기리며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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