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무시에 나옹 선사 "고려에서 해 떠야 중국 산 붉어진다"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2022.01.12 05:00

업데이트 2022.01.12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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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풍경1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왔을 때
나옹 선사는 37세였습니다.
지금 나이로 치면
젊디젊은 나이입니다.
나이에 비해 나옹의 내공은 전혀 달랐습니다.

(下) 중국인이 무시하자 나옹 선사 “고려에서 해가 떠야 중국의 산과 바다가 붉어진다”

나옹이 중국에 머물 때였습니다.
스승인 지공 선사는 원나라 수도였던 옌징(지금의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스님이었습니다.
지공 선사 밑에는 숱한 중국 스님들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선방에서 참선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선승(禪僧)이었습니다.
지공 선사는 그 많은 스님들을 제치고
고려 땅에서 온 나옹에게 ‘판수(板首)’를 맡겼습니다.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에서 첫째로 합격한 사람을
‘판수(板首)’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장원급제’쯤 되겠지요.
당시 중국의 선종 사찰에서는 수행하는 스님들 중에서
가장 윗스님을 ‘판수(板首)’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총림(叢林, 강원ㆍ선원ㆍ율원을 모두 갖춘 큰 사찰)에서
최고 지도자인 방장 아래 이인자를 ‘수좌(首座)’라고 부릅니다.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금강산 마하연의 마애불인 묘길상. [중앙포토]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금강산 마하연의 마애불인 묘길상. [중앙포토]

나옹 스님은 중국에서 10년간 머물렀습니다.
당시 나이는 27세~37세였습니다.
그런데도 지공 선사는 나옹에게 판수를 맡겼습니다.
나이는 비록 젊지만 깨달음의 안목이 달랐던 겁니다.
다른 스님들을 능히 일깨우고 가르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사실 지공 선사와 나옹 스님은
스승과 제자 사이였지만,
서로의 소리를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서로의 ‘지음(知音)’이었습니다.
산에 부는 푸른 바람과 강 위에 뜬 달을 담아내는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오직 친구였던 종자기만 알아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옹화상어록』에는 지공 선사와 나옹 스님이 주고받는
둘 만의 거문고 소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에서 말사인 상원사로 가는 길에 단풍이 우거져 있다. 나옹 선사는 상원사 북대 미륵암에서 머물기도 했다. [중앙포토]

강원도 평창의 월정사에서 말사인 상원사로 가는 길에 단풍이 우거져 있다. 나옹 선사는 상원사 북대 미륵암에서 머물기도 했다. [중앙포토]

#풍경2

하루는 나옹 스님이 시를 지어 지공 선사에게 드렸습니다.

“이 마음 어두우면
  산은 산, 물은 물인데
  이 맘 밝아지면
  티끌 티끌이 한몸이네.
  어둠이랑 밝음이랑 함께
  거두어 버리니,
  닭은 꼬끼오, 새벽마다
  꼬끼오.”

이 시에는 나옹의 눈이 담겨 있습니다.
어두웠던 눈이 밝아지자
세상이 어떻게 달라져 보이는지,
시적인 표현과 깊은 울림으로
나옹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어두울 때는 ‘산 따로 물 따로’ 입니다.
그래서 “산은 산, 물은 물”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는 분리의 강물이 흐릅니다.
둘은 하나가 되질 못합니다.

마음이 밝아지자 달라집니다.
산도 비었고, 물도 비었음을 깨닫습니다.
이제는  ‘산 따로 물 따로’가 아니라
산과 물이 서로 통합니다.

나옹의 스승인 지공 선사는 인도 출신이었다. [중앙포토]

나옹의 스승인 지공 선사는 인도 출신이었다. [중앙포토]

그뿐만 아닙니다.
산과 물만 비어 있는 게 아닙니다.
나를 괴롭히는 온갖 번뇌도
본래 비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에 쌓이는 띠끌을
닦고 쓸고 치우려고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이제는 띠끌을 치울 필요가 없습니다.
띠끌은 그대로 있지만,
띠끌 자체가 비었음을 깨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옹 선사는
“띠끌 띠끌이 한몸이네”라고 노래합니다.
나옹의 깨달음이
어둠과 밝음을 나누는 이분법적 나눔을
거두어 버립니다.

바로 그때 닭이 웁니다.
“꼬~끼~오!”

새벽마다 웁니다.
“꼬~끼~오!”

그건 누가 우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세상이 몸을 비울 때 비로소 들리는
부처의 소리입니다.

나옹 스님의 시를 읽고서
지공 선사는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나도 아침마다 징소리를 듣는다네.”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마하연 묘길상은 아주 큰 규모의 마애불이다. 고려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마애불의 얼굴이 고려인의 얼굴이다. [중앙포토]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마하연 묘길상은 아주 큰 규모의 마애불이다. 고려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진다. 마애불의 얼굴이 고려인의 얼굴이다. [중앙포토]

나옹의 거문고 소리,
나옹의 닭울음 소리를
지공 선사는 빠짐없이 알아듣고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둘의 소리는 그렇게 통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지음(知音)’이었습니다.

#풍경3

몽고 제국은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손을 뻗쳤습니다.
원나라는 그런 몽고족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몽고에 의해 강남으로 밀려난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랜 세월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무리 절집이지만
동방의 고려땅에서 온 나옹 스님을 무시하는 일이 없었을까요.
실제 그런 일화도 있었습니다.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는 나옹 선사의 부도와 석등. 나옹이 출가하기 전에 고려를 찾은 적이 있던 지공 선사도 회암사에 머문 적이 있다. [중앙포토]

경기도 양주의 회암사에 있는 나옹 선사의 부도와 석등. 나옹이 출가하기 전에 고려를 찾은 적이 있던 지공 선사도 회암사에 머문 적이 있다. [중앙포토]

나옹 스님이 중국 절강성 항현 남병산에 있는 절을 찾았습니다.
거기서 나이 드신 스님이 물었습니다.

“스님 나라에도 참선법이 있는가?”

나옹이 고려 출신임을 알고 무시하는 발언이었습니다.
물론 그 밑에는 중국인 특유의 중화사상이 깔려 있었겠지요.

이에 나옹 스님은 게송(절집에서 스님들이 짓는 시)으로 답을 했습니다.

  “해 뜨는 우리나라에서 해가 떠야
   강남 땅 산과 바다는
   함께 붉어집니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우리는 우리
   너는 너라고,
   신령한 빛이야
   언제나
   그 빛이지요.”

멋지고 통쾌하지 않습니까.
대륙의 동쪽 끝이라 우리나라는 예부터 ‘동국(東國)’이라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동쪽 끝에 있는 고려에서 해가 떠야
비로소 중국 대륙의 강남과 강북에도 빛이 들어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함께 붉어지는 겁니다.

고려인이라 무시하는 중국인 노스님에게 나옹 선사는 "고려에서 해가 떠야 중국의 산과 바다가 붉어진다"고 대답했다. [중앙포토]

고려인이라 무시하는 중국인 노스님에게 나옹 선사는 "고려에서 해가 떠야 중국의 산과 바다가 붉어진다"고 대답했다. [중앙포토]

나옹의 지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너는 너라고 나누고 분별하는
그 마음을 돌리라고 일갈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신령한 빛은
동과 서를 나누지 않고,
남과 북을 가르지 않는,
언제나 신령한 그 빛이기 때문입니다.

나옹은 깨달음의 눈으로
반박과 지적과 가르침을
동시에 전한 셈입니다.

그 노스님은 아무런 말도 못했습니다.

이 일화만 봐도 나옹 선사가
왜 당시 중국에 살던 고려 유민의 자부심이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나옹 선사가 스무 살 때 출가해서 머리를 깎았던 경북 문경의 묘적암. [중앙포토]

나옹 선사가 스무 살 때 출가해서 머리를 깎았던 경북 문경의 묘적암. [중앙포토]

#풍경4

나옹 선사가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왔을 때는
공민왕 7년이었습니다.

당시 공민왕은 반원(反元) 노선을 천명하며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깃발을 올렸습니다.

나옹은 고려로 돌아온지 4년 만에 공민왕을 만났습니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나옹 선사에게
나라에서 세운 절인 신광사의 주지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나옹이 한사코 사양하자
공민왕은 “저도 불법(佛法)에서 물러나겠습니다”라며 배수진을 쳤습니다.
결국 나옹 선사는 신광사 주지를 맡았습니다.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나옹 선사에게 나라에서 세운 절 신광사의 주지를 맡아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중앙포토]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나옹 선사에게 나라에서 세운 절 신광사의 주지를 맡아 줄 것을 간곡히 청했다. [중앙포토]

나옹이 신광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북녘땅에서 홍건적이 고려로 쳐들어 왔습니다.
대륙에서 원나라와 싸우다 쫓기던 홍건적이
고려를 향해 남하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굉장한 난리였습니다.
임금은 물론이고 도성의 백성도 모두 피난을 갔습니다.
이때 공민왕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지금의 개성)을 떠나
경북 안동까지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주위 스님들은 나옹 선사에게도 몸을 피할 것을 청했습니다.
나옹은 거절했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살 것입니다. 홍건적인들 어찌하겠습니까?”
나옹 선사는 텅 빈 도성에서 그렇게 신광사를 지켰습니다.

삶과 죽음에 초연한 나옹 선사의 모습에
사람들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나옹 선사를 찾아온 홍건족의 우두머리는
깊은 감화를 받고서 침향(沈香) 한 조각을 스님께 올렸다고 합니다.

#풍경5

홍건적이 물러가자 나옹 선사는
신광사를 떠나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으로 갔습니다.
지금도 오대산 상원사 북대에는
나옹 선사가 좌선을 했다는 ‘나옹대’가 남아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의 북대 미륵암에는 나옹 선사가 머물며 좌선을 했다는 나옹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중앙포토]

오대산 상원사의 북대 미륵암에는 나옹 선사가 머물며 좌선을 했다는 나옹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중앙포토]

또 북한의 금강산에는 나옹 선사가 직접 바위에 새겼다고 전해지는
마애불인 ‘묘길상’이 있습니다.

예전에 금강산 내금강에 갔을 때
묘길상 앞에 선 적이 있습니다.
둥그런 얼굴에 온화한 미소,
묘길상 마애불은 고려인의 얼굴이었습니다.

조각 하나하나에
나옹 선사의 손길이 직접 닿았다고 생각하니
가슴 뭉클했던 생각이 납니다.

37세에 고려로 돌아온 나옹은
20년 뒤인 57세에 경기도 여주의 신륵사에서 입적했습니다.
그때가 1376년 5월 보름날이었습니다.

나옹 선사가 입적하자
중국은 사람을 보내 스님의 사리를 가져가고
일본에서는 스님의 영정을 모셔갔습니다.
나옹의 명성은 동북아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리던
고려말의 충신 목은 이색은 나옹 선사의 빗돌(비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한평생 세속의 문자를 익히지 않으셨으나
   글을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붓을 들어 그 자리에서 써주셨는데,
   아무런 힘들임 없이 짓는데도
   그 이치와 멋이 깊고 그윽했다.”

나옹선사

나옹선사

나옹 선사는 공민왕의 스승이었고,
무학 대사의 스승이었습니다.
무학 대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습니다.
고려와 조선을 잇는 건널목에
‘나옹’이라는 걸출한 선사가 있어
이땅에 ‘살아 숨 쉬는 불교’가 가능하게 했습니다.

700년 세월이 흘렀지만
나옹 선사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적십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노여움도 내려놓고 아쉬움도 내려놓고 (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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