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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권 정치’의 폐막과 ‘민권 정치’의 복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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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홍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전 국무총리

이홍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전 국무총리

새해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을 천명한 헌법 제1조 1항을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도록 대권 정치의 폐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봉건시대에는 왕권이 있었고 독재시대에는 패권이 있었지만, 근래 한국 정치에서는 국가 운영을 좌우하는 권력을 대권이라 부른다. 이는 한국 정치가 그만큼 민주정치의 정상적 기준에서 이탈한 것을 반영한다.

대한민국 건국 지도자로서 선거 부정과 독재에 분노한 국민적 저항으로 퇴임과 망명을 강요당했던 이승만 시대에도 헌법을 초월한 대권이란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전성철 변호사 등에 따르면 지난 몇 해 민주정치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무시하고 초헌법적으로 국가 운영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약자 편에서 정의의 깃발을 앞세운 진보정치가 모든 권력을 통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이른바 진보콤플렉스로 무장한 데서 비롯된 이상 현상으로, 대권이란 용어나 개념은 그런 현상을 반영한다. 정의를 독점할 수 있다는 오해는 가치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민주정치나 헌법 제도와 공존하기 어렵다. 올해 대선은 한국 정치에서 초헌법적 대권이란 망상을 정리할, 한국 정치를 헌법에 입각한 정치로 되돌릴 수 있는 계기라 할 수 있다.

‘대권’이란 말은 민주정치에 위배
대선은 여야 관계 복원 계기 돼야

5년 단임제 대통령제에서 임기 중 대통령 권력의 안정적 유지를 보장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경우도 있었다. 아직도 두 전임 대통령이 법원 판결로 형 집행 또는 사면 대상이 된 한국으로선 대통령의 대권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재고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대통령 단임제를 5년 단임으로 헌법에서 보장하기보다는, 의회 다수당이나 다수표를 확보한 국무총리가 내각을 구성하고 국정을 총괄하는 의원내각제가, 불필요한 대권 논쟁도 피하고 국민주권 원칙을 되살리는 데 바람직하다는 대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성공적 민주국가는 대통령제보다 내각제로 운영된다. 그러나 지금은 3월 대선이 가까워졌기에 헌정제도 선택을 논하기에는 적절한 시점이 아니다. 여야가 선거 후에라도 헌정제도 문제를, 특히 대권이란 이상한 표현이 난무하는 후진성을 탈피하기 위한 개헌을 심각하게 시도할 필요가 있다.

현행 헌법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대통령과 국회가 정치적으로 협조하는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제도보다는 정치적 선택과 결단의 문제임을 한국 정치사가 보여준다. 1987년 6월 항쟁 결과로 군사정부가 6·29선언으로 받아들인 직선제 헌법에 따른 선거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됐다. 그의 취임 2개월 뒤 치러진 13대 국회 선거는 헌정 사상 최초의 여소야대 국회였다. 국민 관심이 집중된 5공특위와 통일특위는 세 야당이 주도했다.

노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회에서 대결보다는 협력의 여야 관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특히 모든 국민과 정당이 큰 관심을 가진 통일방안을 청와대나 대통령이 주도하지 않고 여야 4당의 협의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다당제 국회와 정치 운영의 새 시대를 열었다. 새 통일방안인 ‘한민족통일방안’은 통일원 장관이 기초했지만 세 야당 총재와 긴밀한 협의를 거듭한 뒤 국회 본회의에 제출했고,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대통령이 국회의 역할을 인정하고 협조함으로써 예상을 넘는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 대통령이 국회와 야당의 입장을 중시하는 자세와 입법과정을 택한 게 결정적 전기가 됐지만,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세 야당 총재의 대국적인 협력은 지금의 국회가 배워야 할 덕목이다.

청와대가 모든 걸 결정해 국민과 정치권의 참여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한국 특유의 ‘대권병’은 피하기 힘든 역경이다. 지도자와 국민이 대한민국을 모범적 민주국가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겠다는 새로운 각오를 함께 한다면 올해 대선은 밝은 미래를 내다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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