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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블랙 스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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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현예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김현예 JTBC 국제외교안보부 차장

김현예 JTBC 국제외교안보부 차장

1697년 1월의 어느 날. 네덜란드 출신 탐험가가 호주 서부 땅을 밟는다. 그가 향한 곳은 스완강. 이곳에서 그는 흑고니(黑鳥)를 보고 크게 놀란다. 깃털이 하얀 고니(白鳥)만을 알고 있던 유럽인에겐 충격과도 같은 발견이었다.

붉은 부리와 깃털 색 때문에 ‘악마의 사자’로 불리며 몰살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이 흑고니가 유명세(?)를 탄 건 2007년의 일이다. 월가 헤지펀드 매니저였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61)가 저서 『블랙 스완(Black Swan)』을 쓰면서다. 그는 세계를 흔들었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예언하며 ‘예상치 못했던 돌발 악재’를 뜻하는 용어로 블랙 스완을 썼는데, 세계 금융위기와 함께 널리 퍼졌다.

이후 연말이면 유명 투자은행, 경제 전문매체 등은 새해 운수 점치듯 새해 ‘블랙 스완 예측’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른바 악재 시나리오였는데, 그중 더러는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예컨대 2016년을 맞아 나온 예상 중 하나는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이었다. 미·중 무역 전쟁 가능성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양국은 총성 없는 전쟁을 치렀다. 영국의 유로존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Brexit)도 블랙 스완으로 꼽혔는데, 이 역시 실현됐다.

신축년(辛丑年) 마지막 날이다. 올 한해 우리 모두 예측지 못했던 악재 속에서 분투했다. 백신만 맞으면 마스크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새롭게 나타난 변이 바이러스인 오미크론으로 발이 묶였다. 아프면 의료진으로부터 응당 치료받는 것이 우리네 상식이지만, 확진자 증가로 재택치료에 적응해야 했고 확진된 산모는 병상이 없어 병원을 전전하다 구급차에서 아기를 낳았다.

살림살이는 팍팍했다. 천정부지 치솟는 집값을 잡겠다고 정부가 대출길을 막아버려 급전이 필요한 이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세금은 올랐고, 대졸 이상자 취업률은 2011년 조사 이래 최저치(65.1%)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기초생활 수급비를 아껴 기부한 80대 노부부, 폐지를 팔아 번 돈을 내놓은 70대 어르신, 22년째 거금 기부를 이어온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 이야기는 올해도 어김없이 들려왔다. “인생이란 한 줌에 불과한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몰고 온 파장이 쌓인 결과(나심 탈레브)”라고 한다. 고비 많았던 다사다난한 한 해를 버텨낸 모두에게 박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