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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트럭에 5만원권 현금다발…22년째 찾아온 '얼굴 없는 천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7009만496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22년간 모두 23차례에 걸쳐 총 8억872만8110원을 기부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7009만496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22년간 모두 23차례에 걸쳐 총 8억872만8110원을 기부했다. 사진 전주시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세요" 

"불우한 이웃을 도와주시고 따뜻한 한 해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전북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29일 노송동주민센터에 두고 간 성금 상자에 담긴 편지에 적은 글이다. 그는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이같이 말했다.

21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주민센터에 익명으로 7억원이 넘는 성금을 기부해 온 전주의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2019년 이맘때 그가 두고 간 성금 6000여만원을 2인조 절도범이 훔쳐 달아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얼굴 없는 천사'는 선행을 멈추지 않았다.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29일 노송동주민센터 인근에 두고 간 성금 상자. 5만원권 지폐로 7000만원과 돼지 저금통에 담긴 동전까지 현금 7009만4960원이 들어 있었다. 사진 전주시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29일 노송동주민센터 인근에 두고 간 성금 상자. 5만원권 지폐로 7000만원과 돼지 저금통에 담긴 동전까지 현금 7009만4960원이 들어 있었다. 사진 전주시

22년간 총 8억872만8110원 기부 

29일 전주시에 따르면 '얼굴 없는 천사'는 이날 오전 10시5분쯤 노송동주민센터 인근 성산교회 주변에 주차된 5t 트럭 적재함에 돼지 저금통과 함께 5만원권 지폐 다발이 든 성금 상자를 두고 사라졌다.

'얼굴 없는 천사'는 노송동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성산교회 오르막길 부근에 있는 트럭 적재함 위에 박스를 놓았습니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주세요"라고 말했다. 전화를 받은 최영면 노송동주민센터 복지도우미는 "목소리로 보아 40대 남자였다"며 "미처 감사의 뜻을 표현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고 말했다.

주민센터 직원들이 확인해 보니 성산교회 앞에 주차된 트럭에 성금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과 동전이 담긴 돼지 저금통 1개가 들어 있었다. 금액은 모두 7009만4960원이었다.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7009만496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22년간 모두 23차례에 걸쳐 총 8억872만8110원을 기부했다. 사진 전주시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직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 7009만4960원을 세어 보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22년간 모두 23차례에 걸쳐 총 8억872만8110원을 기부했다. 사진 전주시

주민센터 직원 "감사 전하기도 전 전화 끊어" 

주민센터 직원들은 전화를 건 시점과 내용·목소리 등을 볼 때 전화한 남성을 '얼굴 없는 천사'로 보고 있다. 이름·직업 등 모든 게 베일에 싸인 '얼굴 없는 천사'는 매년 12월 성탄절 전후에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 수천만원에서 1억원 안팎의 성금과 편지를 담아 노송동주민센터에 두고 사라지는 익명의 기부자다. 올해는 A4용지 상자가 아닌 택배 상자에 성금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얼굴 없는 천사'는 2000년부터 올해까지 22년간 모두 23차례에 걸쳐 총 8억872만8110원을 기부했다. 전주시는 그간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 노인 등 소외 계층 6158세대에게 현금이나 쌀·연탄·난방주유권 등으로 지원했다.

지난 2019년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을 훔친 용의자 2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9년 12월 30일 '전주 얼굴 없는 천사' 성금을 훔친 용의자 2명이 고개를 숙인 채 전주 완산경찰서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성금 도난…2인조 절도범 붙잡혀

전주에서는 2019년 말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이 사라지기도 했다. 충남 논산과 공주 지역 선·후배인 A씨(37)와 B씨(36)는 2019년 12월 30일 오전 10시7분쯤 '얼굴 없는 천사'가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 뒤편 천사공원 내 '희망을 주는 나무' 밑에 두고 간 성금 6016만3510원을 상자째 차량에 싣고 도주한 혐의(특수절도)로 기소됐다.

법원은 A씨 등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보다 무거운 형량을 선고했다. 전주지법 형사1부(부장 강동원)는 지난해 6월 A씨와 B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각각 징역 1년과 징역 8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징역 1년 6개월과 징역 1년을 선고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익명의 기부자는 매년 사회적 약자와 불우한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많은 돈을 주민센터 앞에 몰래 놓곤 했다"며 "그러나 피고인들은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고귀한 돈을 사전에 계획해 훔쳐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밝혔다.

2020년 1월 2일 김영근 당시 전주 완산경찰서 형사과장이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훔친 피의자들로부터 압수한 6016만3510원을 노송동주민센터 관계자에게 인계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0년 1월 2일 김영근 당시 전주 완산경찰서 형사과장이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훔친 피의자들로부터 압수한 6016만3510원을 노송동주민센터 관계자에게 인계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주시, 순찰·감시 활동 강화

A씨 등은 범행 당일 5시간도 안 돼 각각 충남 계룡과 대전 유성에서 붙잡혔다. "이틀 전부터 주민센터 근처에서 못 보던 차가 있어서 차량 번호를 적어놨다"는 노송동 한 부부가 건넨 메모가 결정적 단서가 됐다. 경찰이 회수한 A4용지 상자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100장씩 각 500만원) 12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있었다.

이후 전주시는 '얼굴 없는 천사'의 성금 상자를 지키기 위해 노송동 주민센터 주변에 1500만원을 들여 폐쇄회로TV(CCTV)를 설치했다. 차량 번호판까지 인식할 수 있는 첨단 방범 카메라다. 전주 완산경찰서와 CCTV 관제센터는 전주시 요청에 따라 주민센터 인근 순찰과 감시 활동을 강화했다. 전주시 관계자는 "그간 신분 노출을 꺼리는 '얼굴 없는 천사'를 배려해 CCTV를 달지 않았지만, '성금 도난 사건' 이후 그의 기부금이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전주는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으로 인해 따뜻한 '천사의 도시'로 불려 왔으며, 익명으로 후원하는 시민들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며 "얼굴 없는 천사와 시민들이 베푼 온정과 후원의 손길을 어려운 이웃들에게 잘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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