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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길 잃은 경제정책, 국민만 혼란

중앙일보

입력

경제 정책이 방향을 잃었다. 내년 3월 대통령 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 식의 공약만 난무한다. 중심을 잡아야 하는 정부까지 나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23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페이스북에 “1세대 1주택자의 세 부담 완화를 위해 (중략) 다양한 대안 중 어떤 것이 적정한지 꼼꼼하게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논의 선상에 오른 대안은 ▶150%인 세 부담 상한 하향 조정 ▶내년 종합부동산세 과세표준 산정 시 올해 공시가격 적용 ▶고령자 종부세 납부 유예 제도 도입 등이다.

상속 주택, 중종 보유 주택 등 부득이한 이유로 여러 채를 보유한 사람의 세 부담을 낮추는 방안도 검토 대상이다. 정부는 지난달 종부세 고지서가 발송된 뒤 ‘세금 폭탄’ 논란이 일자 “우리나라의 보유세 부담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보유세 완화를 요구한 지 불과 보름여 만에 입장을 바꿨다.

3월 이후로 밀린 주요 정책.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3월 이후로 밀린 주요 정책.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홍 부총리는 세 부담 완화와 관련해 “내년 3월 중 구체적인 추진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바로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있는 달이다. 새 대통령이 뽑혀 인수위원회가 구성되고, 새 정부 공식 출범까지 불과 두 달 남은 때를 보유세ㆍ공시가 개편 ‘디데이(D day)’로 잡았다. 개편안을 내놓더라도 뜻대로 시행할 수 있을지는 당연히 미지수다.

하지만 홍 부총리는 보유세는 물론 다주택자 양도소득세도 한시적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이 후보의 주장은 반영하지 않았다. 지난 22일 민주당은 부동산세 개편 방향을 논의할 워킹그룹을 만들어 당정 갈등 봉합에 나선다고 밝혔지만, 이견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여당이나 정부와 또 다른 방향의 부동산 세제 공약을 공식화했다. 페이스북에 “종부세와 재산세를 통합 추진하겠다. 통합 이전이라도 세 부담 완화 조치를 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사실상 종부세 폐지 공약이다.

윤 후보는 이어 “2022년 주택 공시가격을 2020년 수준으로 환원하겠다. 한 해에 공시가격을 19%나 올리는 국가는 없다. 윤석열 정부는 관련법 시행령을 개정해 공정시장가액비율을 인하할 것”이라고도 했다. 내년 공시가를 올해 수준으로 낮추겠다는 당정 방침보다 한 발 더 나갔다.

19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엄수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헌화를 마치고 자리로 향하는 동안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묘소로 향하고 있다. 뉴스1

19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서 엄수된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9주기 추모식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헌화를 마치고 자리로 향하는 동안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묘소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윤 후보는 이밖에도 ▶공정시장가액비율 95%로 동결 ▶세 부담 상한 인하 ▶1주택자 세율 전 정부 수준 인하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세율 적용 최대 2년 한시 유예 등도 공약했다. 문재인 정부나 여당이 추진하는 부동산 세제 개편안과는 온도 차가 분명했다.

정부 따로, 여당 따로, 야당 따로. 제각각 다른 주장을 펼치며 부동산 시장 혼란만 부추기는 중이다.

100조원 소상공인 손실보상 지원을 둘러싼 논란과 판박이다. 지난달 초 윤 후보는 50조원 규모로 소상공인 손실을 전액 보상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손실 보상 액수를 같은 당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이 100조원으로 불렸다. 이런 야당 움직임에 이 후보는 “당장 추진하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자”며 판을 더 키웠다. 홍 부총리는 “내년 초 추경은 고려 안 한다”고 맞서며 당정 갈등으로 비화했고, 결국 내년 3월 누구든 대통령이 되면 추경을 해 소상공인에게 100조원을 뿌린다는 정도로 논의는 흐지부지됐다.

부동산 세제, 손실보상만이 문제가 아니다. 공공요금 조정, 포괄적ㆍ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까지. 굵직굵직한 경제 정책 판단이 대선 뒤로 밀리고 여야정 간 이견만 표출되며 혼선이 거듭되고 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3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 참석했다. 연합뉴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경제는 글로벌 가치 사슬이 무너지고, 인플레이션(고물가)과 함께 경기가 둔화하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주요국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명확하게 (긴축) 노선을 잡고 움직이고 있어 한국도 금융시장이나 부동산 등에 상당한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안 교수는 “세법 등 일관성이 중요한 경제 정책은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게 정상적인 국가의 모습인데, 경제정책의 콘트롤타워인 기재부가 도리어 대선이 있는 내년 3월에 정책을 발표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정치적 고려를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박영범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그동안 정부의 정책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대선을 빌미로 내놓는 임시방편으로 잘못을 덮는 것”이라고 짚었다. 박 교수는 이어 “글로벌 공급망에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고 오미크론 변이 등장 등 경제 상황 불확실성이 지속하는 상황에 일관된 경제 정책이 중요한데 과거보다 더 흔들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용어 사전

세 부담 상한=보유세 책정 기준이 되는 공시가가 오르더라도 전년 대비 일정 비율(현행 1주택 150%) 이상 세금을 높이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

과세표준=세금을 부과(과세)하는 기준이 되는 금액. 각종 공제액을 덜어낸 표준금액을 뜻한다. 과세표준에 세율을 곱한 값이 실제 내야하는 세금으로 보통 정해진다.

공정시장가액비율=과세표준을 정할 때 반영하는 공시가 비율. 올해 종부세 공정시장가액비율은 95%인데 공시가의 95%만큼만 세금을 부과한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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