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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수십조 세금 쓰고서…왜 ‘언 발에 오줌 누기’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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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논설위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우리 국민은 돈 씀씀이에 큰 교훈을 얻고 있다. 필요할 경우 단위 항목 예산에 1조원대는 물론, 수십조원도 쓸 수 있다는 경험이 그것이다.  66조6000억원. 지난해 5월 1차부터 올 9월 5차까지 지급된 재난지원금 누적 규모다. 1차 재난지원금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했다. 14조3000억원을 투입해 4인 가구 기준 최대 100만원을 지급했다. 2차(2020년 9월말, 7조8000억원), 3차(올 1월, 9조3000억원), 4차(19조5000억원), 5차(15조7000억원) 땐 소상공인·자영업자 등을 대상으로 선별 지원했다. 여·야 대선 후보가 50조~100조원 ‘말 잔치’를 벌인 6차 지원금은 아직 불투명하다. 정부는 대신 4조3000억원을 들여 320만 소기업·소상공인에게 100만원씩 나눠주기로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최대 피해자인 소상공인·자영업자들은 정부의 재난지원금을 어떻게 생각할까. 국민의힘 소상공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최승재 의원은 “재난지원금의 심각한 문제는 물에 빠져 목숨이 넘어가는 사람과 물가에서 놀고 있는 사람을 똑같이 취급하는 것”이라며 “수십조원의 국민혈세로 아무도 만족하지 않는 거대한 낭비를 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코로나지원금 2년간 66조원 달해
“아무도 만족않는 거대한 낭비한 꼴”
정부 예산 미래 바꿀 곳에 투자해야
“대통령이 나서야 관료 움직여”

지난 10월 대전의 한 상가 매장 앞에 5차 재난지원금 중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의 사용처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지난 10월 대전의 한 상가 매장 앞에 5차 재난지원금 중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의 사용처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프리랜서 김성태

조(兆) 단위는 얼마나 큰 돈일까.  우선 1조원만 해도 개인에겐 꿈도 못 꿀 초거액이다. 하루 100만원씩 쓴다고 해도 2739년하고 7일이 더 걸린다. 하지만 1조원을 집에 쌓아두고 쓰는 사람은 없을 터. 연리 1% 이자를 받는 은행에 넣어두고 쓴다고 한다면, 단순 연간 이자수익만 100억원이 발생한다. 하루 100만원씩만 쓴다면 1조원의 원금이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과학기술계에 1조원으로 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 뭐냐고 물어봤다. 그간 ‘거대한’ 예산이 들어 도저히 할 수 없었지만,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해야만 하는 과제가 수두룩했다. 코로나19 백신, 양자기술, EUV 노광장비, 우주망원경, 민간 우주발사대, 유전자 해독기…. 하나같이 독자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면 한국이 미국·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세계 과학기술계와 산업계를 선도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들이다.

코로나19 백신부터 살펴보자. 미국의 모더나와 화이자는 코로나19 유행 8개월 만에 메신저 RNA를 이용한 백신을 만들어냈다. 앞서 십수년간의 연구개발 축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워프 스피드 작전’(Operation Warp Speed)이란 이름으로 군사작전 하듯 규제를 풀고 대규모 자금을 지원해 백신 개발을 밀어붙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이자 백신 19억5000만 달러(2조2000억원), 모더나 백신 24억5500만 달러(2조7000억원)를 미국 정부로부터 사전구매 계약 방식으로 자금을 지원받았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 정부는 코로나19가 유행한 지 1년 반 이상이 지난 올 9월에서야 ‘국산 코로나19 치료제·백신 등의 개발을 위해’ 내년에 5265억원을 투입한다고 발표했다. 정작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하고 있는 국내 기업들 중 지금껏 정부로부터 100억원 이상 지원을 받은 곳은 단 한 군데도 없다. 백신개발은 3차 임상에만 수천 억원이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하면 코로나19 백신 개발 지원에도 ‘언 발에 오줌 누기’식이었던 셈이다.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양자기술은 미국과 중국이 기술패권 경쟁을 벌이는 핵심분야다. 양자컴퓨터가 개발되면 블록체인은 물론, 세상의 모든 암호체계가 무력화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양자컴퓨터 기술 수준은 미국 대비 71.8%로, 현격히 낮다. 그럼에도, 정부가 올해 양자기술 R&D에 투자한 돈은 326억원이다. 그것도 2019년 대비 220억원이나 늘어난 수치이지만, 선진국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인 셈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반도체 분야도 마찬가지다. 대학과 중소기업의 첨단 반도체 연구·개발(R&D)을 지원하는 나노종합기술원이 보유한 첨단 노광장비가 20㎚(나노미터) 수준의 반도체 회로를 그릴 수 있는 노광장비 ArF 이머전 스캐너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선두경쟁을 벌이는 10㎚ 이하엔 극자외선(EUV) 공정이 필요한데, 나노종합기술원으로선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EUV 장비의 대당 가격은 2000억원이다.

지난 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총 29조 7770억원의 2022년도 정부 R&D 예산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에서 세계 1, 2위 경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을 멀찌감치 따돌릴 수 있는 규모다. 그럼에도, 특정 게임 체인저 기술에 과감한 투자를 하지 못하고 언 발에 오줌 누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뭘까.

“백신의 경우 임상에 들어간 기업만이라도 제대로 된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특정 기업에 돈만 쏟아붓고 실패했다는 소리를 들을 경우 감사에 대한 부담도 있다. 우리나라는 실패에 관대하지 않은 게 현실 아닌가. 미래를 내다보고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하는데, 안타까울 뿐이다. 결국,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의지를 보여야 관료가 움직인다.” 익명을 요구한 한 중앙정부 관료의 말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