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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曰] 출제 오류의 교훈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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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7호 34면

장혜수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엿 먹어.” 분명히 욕설인데, 상대는 의뭉을 떤다. “엿 먹고, 시험에 착 붙듯이 다 잘되라고.” 엿 욕설의 유래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입학시험 출제 오류의 고전, 이른바 ‘무즙 파동’이다. 1964년 12월 7일, 1965년도 서울시 전기 중학입시가 열렸다. 당시는 시험을 쳐 명문 중학교에 진학하던 시절이다.

이런 문제가 출제됐다. ‘엿기름 대신 넣어서 엿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보기는 ①디아스타제 ②꿀 ③녹말 ④무즙이었다. 입시 당국이 발표한 답은 ①번 디아스타제인데, ④번 무즙도 답이 될 수 있었다. 무즙에 디아스타제 성분이 들어있다. ④번을 써 한 문제 차로 원하는 학교에 가지 못한 학생의 부모들은 가만있지 않았다. 항의해도 소용없자 급기야 무로 엿을 쑤었다. 담당기관을 찾아가 엿을 들이밀며 소리쳤다. “무즙 엿 먹어보라.” 결국 무즙은 복수정답이 됐고, 해당 학생들은 합격 처리됐다. 관련 고위 당국자들은 줄줄이 사표를 썼다. ‘무즙 파동’은 몇 해 뒤 중학입시 폐지의 계기가 됐다.

수능 오류로 또 다시 홍역
지난 잘못서 왜 못 배우나

‘무즙 파동’은 다음 출제 오류 사건에 비하면 애교다. 1998년도 공인회계사(CPA) 1차 시험이 3월에 열렸다. 응시생 이모씨는 “‘경영학’ 과목 문제가 잘못 출제됐다”며 행정심판과 소송을 진행했다. 그는 한 문제 차로 탈락했다. 충격적인 일은 그 다음이다. 이씨는 9월 기자회견을 열고 녹음테이프를 공개했다. 그 속에는 시험을 주관한 증권감독원 측의 회유, 협박, 읍소가 담겨있었다. “합격 때까지 생활비를 대줄 테니 소송을 취하하라” “내년에 2차 시험 응시 기회를 주겠다” “변호사를 선임해 끝까지 싸울 테니 잘 생각해봐라” 등등. 이씨는 승소했고, 다른 출제 오류 피해자까지 총 91명은 3년 뒤 1000만원씩 국가배상을 받았다.

1995년 1월 성균관대 대학별고사(본고사)가 실시됐다. 수학 답안지를 채점하던 이 학교 수학과 김명호 교수는 ‘공간벡터에 대한 증명문제’에서 오류를 발견했다. 학교 측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듬해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 교수는 출제 오류 지적에 대한 보복이라며 소송을 냈다. 김 교수는 패소했다. 재임용 탈락은 다른 이유 때문이라는 게 재판부 판단이었다. 국내외 수학계는 오류 지적이 수학적으로 타당하다며 김 교수를 지지했다. 해외를 떠돌며 어렵게 생활한 김 교수는 2005년 귀국해 재심을 청구했다. 하지만 1심 패소에 이어 2007년 항소마저 기각됐다. 김 교수는 그 직후 석궁을 준비해 판사 집을 찾아갔다. 영화 ‘부러진 화살’의 소재인 ‘판사 석궁 테러’ 사건 실마리도 거슬러 가면 출제 오류였다.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Ⅱ 출제 오류 논란이 지난 15일 법원 판결로 일단락했다. 시험 직후부터 응시생들은 20번 문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 학생들은 문제를 번역해 해외 석학에게 보내기도 했다. 학원가의 해당 과목 ‘1타 강사’부터 국내외 전문가들도 출제 오류를 지적했다. 해당 문제는 최상위권 학생을 변별하기 위한 이른바 ‘킬러 문제’였다. 집단유전학 전문가인 미국 스탠퍼드대 조너선 프리처드 교수는 “고교 시험에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출제된다는 게 매우 놀랍다”고 반응했다.

분위기가 이런데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문제의 조건이 불완전하더라도 답은 낼 수 있으므로 문항의 타당성이 유지된다”고 고집했다. 심지어 정답 결정처분 취소소송에 정부법무공단을 놔두고 대형로펌을 변호인으로 선임했다가 세금 낭비 논란까지 불렀다. 수능이 처음 생긴 1994년 이래 출제 오류 논란은 반복됐다. 복수 정답 인정만 9차례다. 옛말에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지 못하면 사람은 하급이 된다’(困而不學, 民斯爲下, 『논어』 ‘계씨’ 편)고 했다. 도대체 8차례의 어려움에서 무엇을 배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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