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공중 화장실서 '똑 똑 똑 똑'…29명은 11억 이렇게 뜯겼다

중앙일보

입력 2021.12.12 05:00

업데이트 2021.12.12 21:32

지난해 9월 서울 중랑구 한 지하철역. 하늘색 긴 팔 와이셔츠 차림에 안경, 검은 서류가방을 든 30대 남성이 열차에 올라탔다. 1시간 뒤 이 남성은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포착됐다. 옷은 티셔츠로 갈아입었고, 검은 서류가방 대신 백팩을 메고 있었다. 안경은 온데간데없었다. 5시간 뒤 이 남성은 강남구의 한 미용실에서 파마한 뒤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11명에게 2억5000만원을 뜯어낸 보이스피싱 일당 중 한 명이었다. 7시간 동안 5번 변장을 한 이유는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현금만 사용해 지하철과 버스를 여러 차례 갈아탔고 택시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서울 광진경찰서는 CCTV를 토대로 30대 남성 A씨의 신원을 특정해 2개월 만에 검거했다. A씨는 붙잡힌 뒤에도 “보이스피싱에 연루된 줄 몰랐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비대면 사회에 더 판치는 ‘대면편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비대면이 표준이 되면서 보이스피싱범들은 더 대담해졌다. 비대면으로 철저히 속인 이후엔 면전에서 돈을 뜯어가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A씨의 5차례 변장은 대면편취로 피해자에게 돈을 건네받은 이후 도주하는 모습이었다. 경찰청 자료를 보면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2020년 보이스피싱 대면편취는 1만5111건으로 전년보다 약 5배 증가했다.

대면편취에서 돈을 건네받는 이른바 ‘수거책’들의 수법도 치밀해졌다. 지난 2월 서울 강북경찰서는 지하철 공중화장실에서 노크 4번 하는 것을 암호로 정해 돈을 주고받던 보이스피싱 일당을 검거했다. 이들에게 속은 피해자는 29명, 피해 금액은 11억원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보이스피싱의 ‘범죄망’…피해자가 가해자 되기도

비대면 사회는 보이스피싱 ‘범죄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유형의 피해자를 낳고 있다. 코로나19로 수입이 줄어든 서민들이 ‘고액 아르바이트’를 가장한 보이스피싱 수거책 모집 공고에 홀려 가담하는 식이다. 이들 중엔 경찰에 체포된 후에야 자신이 보이스피싱 공범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적지 않다.

관광버스 운전기사 B씨(51)는 지난 8월 보이스피싱 수거책으로 활동한 혐의로 2심에서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지난해 4월 한 구인광고 문자를 보고 전화를 건 게 화근이었다. ‘주 5일 근무, 20대 이상 누구든 할 수 있는 간단한 업무’라는 문구가 B씨를 혹하게 했다. 수화기 너머 남성은 “카지노에서 돈을 잃은 사람들이 전당포에 빚진 돈을 수금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거짓말이었다. 이 말을 믿고 5일간 약 1억원을 보이스피싱범에게 전달한 B씨는 경찰에 체포돼 1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들에게 합의금 7000만원을 주고 나서야 2심에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B씨는 지난해 1월 저금리 대출을 미끼로 한 문자메시지에 속아 2000만원을 대면편취 당한 경험이 있었다. 3개월 만에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다시 속아 피해자에 이어 가해자가 된 것이다. B씨는 “사기꾼들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억울함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안타까운 사람이 많다”고 토로했다.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모집 광고. 인천 서부경찰서 제공

구인구직 사이트에 올라온 보이스피싱 현금수거책 모집 광고. 인천 서부경찰서 제공

온라인 세대 더 취약…“포털이 선제 차단해야”

온라인이 일상인 청년들은 보이스피싱의 유혹에 더 취약하다. 지난해 경찰대학이 펴낸 ‘보이스피싱 전달책의 가담 경로에 관한 연구’ 논문을 보면 2018년 2월~2019년 12월 서울경찰청 관할 경찰서에 검거돼 조사받은 한국인 235명 중 30세 미만이 77%였다. 이들 중 온라인 구직사이트나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보고 가담했다는 비율은 74%였다. 대부분이 ‘송금 업무’ ‘고액 알바’ 등 문구에 흔들려 범죄에 연루된 청년들이었다.

전문가들은 수사기관뿐 아니라 수거책 모집 게시물이 올라오는 포털 등 민간 사업자가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염건웅 유원대 경찰학부 교수는 “보이스피싱 수거책 모집으로 의심되는 인터넷 광고를 경찰이 주기적으로 단속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포털 사업자들이 이러한 게시물을 먼저 차단하기 위한 전문인력을 확보하는 등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보이스피싱 범죄 피해액은 7000억원이 넘었습니다. 테슬라가 한국에서 올린 매출과 비슷합니다. 언택트 사회의 고도화에 맞춰 보이스피싱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사회 시스템을 맹신한 피해자의 충격과 자책은 더 큽니다. 중앙일보는 보이스피싱 피해자들과 수사 기관 및 금융 당국 관계자들을 밀착 취재해 14회에 걸친 기획 〈목소리 사기 7000억 시대〉를 준비했습니다. 12월 13일(월)부터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전체 시리즈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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