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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의 미술관’ 시장, 흥정 좋지만 억지 부리면 곤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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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호 30면

POLITE SOCIETY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미구엘 메르카도 건물. 시장은 신축이건 개축이건 건축자체를 과시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진 박진배]

스페인 마드리드의 산미구엘 메르카도 건물. 시장은 신축이건 개축이건 건축자체를 과시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사진 박진배]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물품을 교환하면서 시작된 시장은 경제활동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다. 청과물시장, 어시장과 같은 전통적 장소 이외에도, 넓은 의미에서의 시장은 주식시장, 자동차시장, 온라인시장, 벼룩시장 등 모든 상거래가 이루어지는 현장을 의미한다. 그중에서도 구경거리가 많고 재미있는 곳은 역시 식재료 시장이다. 신선하고, 오래 두면 상하는, 물기가 있는 상품을 다룬다고 해서 영어로는 ‘젖은 시장(Wet Market)’이라고 표현한다.

도시는 매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유통하고 구입하고 소비한다. 이를 위한 식재료들이 마술처럼 어디서부턴가 도착해서 진열, 준비된다. 농경지나 가축을 기르는 땅, 물고기를 잡는 강이나 바다 등 원래 인간이 필요한 먹거리를 충당하는 곳은 자연이었다. 도시의 형성과 팽창은 이런 장소들을 밖으로 밀어냈다. 모두 시골에서 경작되고, 길러지고, 도축되어 도시로 운송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유통경로를 따라서 새롭게 시장이 형성되었다. 도시의 규모가 크지 않았던 때에는 시내 한가운데 위치해 주변으로부터 식재료를 공급받았다. 아직도 그런 시장들이 꽤 남아 있다. 현대에는 편리성을 앞세운 수퍼마켓이 흔한 모델이 되었지만 전통시장은 그 특유의 생동감, 개인적 교감과 정(情)을 바탕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옛것을 그리워하는 감성과 편리성 이상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는 트렌드도 한몫하고 있다.

먼저 온 손님 거래 마칠 때까지 기다려야

스웨덴 예테보리의 수산시장. [사진 박진배]

스웨덴 예테보리의 수산시장. [사진 박진배]

세계적으로 보면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시장들이 수두룩하다. 마을이나 도심에 특별한 구조물이 없이 만들어지는 노천 시장부터, 과거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던 기차역, 우체국, 공장, 교회 등을 개조하는 경우도 많다. 시장의 공간에는 나름대로 건축적 요소가 깃들어 있다. 연속되는 상점들을 연결하는 주도로와 작은 골목길이 있고, 중간에 광장과 같은 열린 공간도 있다. 마치 하나의 작은 도시와 같다. 시장은 신축이건 개축이건 건축 자체를 과시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회사사옥, 미술관, 관공서, 교회 등 온갖 종류의 건축이 그 자태를 뽐내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기능과 내용이 워낙 역동적이어서 굳이 건축이 근사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회색 도시의 건조한 일상을 벗어나 시장에 들어가면 흥미로운 풍경들이 기다린다. 하이라이트는 시장 안의 맛집들이다. 여기서 주인들은 요리와 서빙, 계산을 겸한다. 수북이 쌓인 음식 바로 앞에 놓인 벤치는 오픈 키친을 바라볼 수 있는 특별 좌석이다. 각종 칼로 재료를 능숙하게 자르고 철판에서 무언가를 뒤집고, 방금 만들어진 음식을 종이에 싸서 건네주는 빠른 손놀림은 근사한 무용 퍼포먼스다.

프랑스 보르도의 전통시장. [사진 박진배]

프랑스 보르도의 전통시장. [사진 박진배]

‘음식은 계절과 결혼한다’는 말처럼 계절 식재료의 진열과 전시는 시장구경의 큰 재미다. 종류, 크기, 가격, 색상별 분류는 기본이다. 배추 잎을 크기별로 가지런히 쌓거나, 생선 곁에 미역줄기나 레몬을 같이 진열하는 디스플레이의 노하우는 수준 높은 미적 감각을 선보인다. 판매대마다 비례, 조화, 대비, 색채, 질감, 반복, 균형과 같은 디자인의 원리들이 실감 나게 구현되어 있다. 시장은 미쉐린 스타 셰프부터 포장마차 상인들, 가정주부까지 모두 찾는 곳이다. 이들이 재료를 볼 때는 그 음식의 생산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요리라는 창작 활동을 생각하고 차려질 식탁,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즐거운 표정과 대화, 함께하는 좋은 시간을 모두 떠올리게 된다. 장을 보는 것은 이런 아이디어와 의식을 위한 준비다.

시장을 방문할 때도 나름대로 에티켓이 있다. 늘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장소인 만큼 일하는 상인들과 다른 손님들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셀카봉은 자제하고, 사진을 찍을 때는 양해를 구하면 좋다. 시장은 박물관이 아니다. 그저 구경만 해도 되지만 작은 물건 하나라도 사면 좋다. 봉지가 손에 들려 있으면 상인들은 감사할 것이다. 시장은 자유경제지만 상인도 손님도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흥정은 좋지만 서로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억지는 곤란하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전통시장. [사진 박진배]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전통시장. [사진 박진배]

상인들은 삶의 현장, 그 첨단에 서 있다. 경제의 예민함을 피부로 느끼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부지런하고, 좋은 물건을 좋은 가격에 구입해야 생존할 수 있다. 친숙한 것을 팔기 때문에 늘 새로워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손님을 대하고 물건을 파는 상인들의 속도는 개개인이 모두 다르다. 그걸 인정하는 일 또한 필요하다. 손이 몹시 빠른 상인이 있는가 하면 동작과 행동이 느린 상인들도 있다. 재촉하지 말고, 내 앞에 먼저 온 한두 명의 손님과의 거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면 좋다. 페이스는 모두 다르지만 상인들은 손님 하나하나를 다 보고 있다는 걸 믿으면 된다. 상인들은 손님 모두를 특별하게, 또 특별하지 않게 대한다. 온종일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에 대한 약간의 격려와 존경을 표현하면 감사한다. 마켓은 편안함이나 안락한 서비스를 위해서 방문하는 곳이 아니다. 다소 불편하더라도 이런 예의를 지키면 모두가 만족스럽다.

시장이 영어로 마켓이고 이곳의 전략이 학문화된 분야가 마케팅이다. 경영학과 수업내용의 원본이 여기에 모두 있다. 흔히 마케팅에서 ‘4P’라고 이야기하는 상품(product), 가격(price), 장소(place), 프로모션(promotion), 나아가 포지셔닝, 포장(packaging) 등의 요소도 관찰할 수 있다. 현대 마케팅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경험마케팅이나 스토리마케팅의 개념도 시장에 있다. 시장의 공간 구석구석, 상인 한 명 한 명이 모두 스토리다. 시장은 새벽 일찍,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시작한다. 상인들에게 동트는 장면을 보는 건 아주 익숙하다. 시장의 소리는 진정한 ‘야상곡(Nocturn)’이다. 상인들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 오늘 장사 잘했는가?”라며 스스로 묻는다. “나 오늘도 열심히 살았는가?”의 은유다.

경제적 지표, 사회적 분위기 알 수 있어

파리의 노천시장. [사진 박진배]

파리의 노천시장. [사진 박진배]

전쟁이나 경제 공황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도 시장은 존재했고 피난민, 실업자, 가난한 사람들은 시장 주변으로 모였다. 그곳엔 늘 먹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은 소비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재료를 가장 합리적인 가격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성적 판단과 행동을 하는 곳이다. 시장은 세계 공통의 활력과 코드를 가진다. 상품의 화려한 진열, 북적임, 상인들의 움직임과 호객의 소리침, 미소가 그것이다. 시장 안에는 인구, 지역, 유통, 감성의 키워드가 포함되어 있다. 경제적 지표와 현재 사회의 분위기도 파악할 수 있다. 어느 도시의 정체성과 보이지 않는 문화와 가치도 표현한다. 그래서 많은 시장은 도시환경의 주요 구성요소이자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시장은 서민들의 미술관이다’라는 말이 있다. 다양하게 진열된 물건의 볼거리가 만들어 낸 표현이다. 차이점은 입장료의 유무, 또는 감상대상이 전시 오브제냐 일상에서 소비하는 물건이냐 일 것이다. 시장에선 모든 게 실제로 존재한다. 볼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만져 볼 수도 있다. 자기의 예산과 필요에 의해서 구입하면 된다. 집에 돌아올 때면 손에 주어진 흡족한 무언가가 있다. 연말연시는 시장방문이 즐거운 시기다. 시장에서의 즐거운 경험은 하루를 기분 좋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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