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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이 ‘한 땀 한 땀’ 수제품, 품격·감성·미학을 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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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9호 27면

POLITE SOCIETY

스페인 톨리도 건물 벽의 수제 타일장식. [사진 박진배]

스페인 톨리도 건물 벽의 수제 타일장식. [사진 박진배]

19세기 말 영국의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은 빅토리아시대의 과시적이고 모방적인 건축 환경과 기계 생산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대중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음에도 소수만 향유할 수 있는 수공예를 고집, 스스로 모순을 남기고 실패했다. 그래도 불필요한 장식의 배제, 기능성과 창의성을 강조하는 사상의 구축으로 최초의 근대 디자인 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를 기점으로 20세기는 새로운 미의 기준이 지배하게 된다. 기계미학을 바탕으로 한 간결한 형태, 소위 말하는 ‘모던 디자인’이다. 거의 한 세기를 유지했던 이 미학은 진지했고 대중적 보편성을 얻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이 주류 경향에 대한 또 다른 반작용이 전개되고 있다. 바로 수작업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와 존중이다. 컴퓨터가 지배하는 디지털 문명에 밀려 유물처럼 취급되던 수제품, 수공예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BBC는 ‘수제혁명(Handmade Revolution)’, CNN은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미국의 셰프이자 방송인 앤서니 보데인(Anthony Bourdin)과 함께 ‘수작업(Craft)’ 다큐멘터리를 각각 선보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진행자들은 대장장이, 목수, 직조장인, 출판인, 구두명인 등을 만나면서 작업과정을 취재하고 근래에 유행하는 수작업의 유행과 본질을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BBC, 대장장이·목수 등 ‘수제혁명’ 보도

뉴욕 소호의 수제 가죽벨트 상점. [사진 박진배]

뉴욕 소호의 수제 가죽벨트 상점. [사진 박진배]

보통 수제(手製)라고 부르는 작업은 자동화된 첨단 기계장치의 도움 없이, 사람의 손으로 아주 간단한 도구만을 사용해서 만드는 과정이다. 이런 전통은 실용적 필요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인류역사와 더불어 발전해 왔다. 5000년 역사를 가진 그릇이나 금속제품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미(美)에 대한 인식이 투영되었다. 공예와 예술로의 승화다. 실용적이면서 또 아름다운 것은 오늘날 ‘예술의 대중화’를 추구하는 디자인 학문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이기도 하다.

수작업은 반복된 학습과 숙련을 기반으로 형성된 기술을 전제로 한다. 거기에 품질, 물성과 감성, 그리고 미적 감각이 더해진다. 종류는 그야말로 광범위하다. 우리가 주변에서 접촉하고 사용, 경험하는  거의 모든 사물을 망라한다. 신발, 가방, 위스키, 악기, 칼, 그릇, 가구, 디저트 등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아일랜드 아란섬의 수제 스웨터. [사진 박진배]

아일랜드 아란섬의 수제 스웨터. [사진 박진배]

위스키 풍미의 60%를 좌우하는 오크통은 장인의 손에 의해서 일일이 망치질되고 조립되며 불에 그슬려진다. 통 속에 저장된 술의 냄새를 맡고 그 변하는 맛을 확인하는 일과 역시 수십 년 경륜의 몰트 마스터가 창고를 직접 다니며 하는 일이다. 아직도 페이지들을 실로 꿰매고 손으로 제본을 하면서 책을 만드는 아리온(Arion Press) 같은 출판사도 존재한다. 100년이 넘은 활자 키보드로 19세기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세계적으로도 거의 드물게 남아있는 회사다. 책은 고가(高價)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는 고객들은 꾸준히 신간을 기다린다.

아일랜드의 아란섬(Aran Islands)에는 집집마다 아내들이 어부 남편과 아들에게 스웨터를 직접 짜 주는 전통이 있다. 풍랑에 견딜 수 있도록, 키우는 양의 털을 일일이 손으로 다듬어 꼼꼼하게 짜는 수작업이다. 오랜 세월 전수되어 왔지만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으로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1960년대부터 미국의 배우들이 입기 시작했고, 이제는 거의 해마다 런던, 밀라노, 파리의 패션쇼에 이 스웨터를 응용한 디자인 컬렉션들이 발표된다.

수제 비누. [사진 박진배]

수제 비누. [사진 박진배]

뉴욕의 연말연시에 가장 인기가 좋은 행사 중 하나는 식물원에서 열린다. 1년간 정원에 떨어진 잎사귀와 나뭇가지, 돌들을 모아서 만든 도시의 축소모델 사이사이로 장난감 기차가 지나가는 전시다. 그 공예의 수준과 정교함에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은 눈을 떼지 못한다. 컴퓨터 게임이 대체할 수 없는 동화 속 세상이다.

서커스 공연을 예술의 수준으로 승격시킨 ‘태양의 서커스’에서는 한 명 한 명의 옷과 모자, 신발이 모두 손으로 제작된다. 그 의상제작을 위한 천도 직접 염색해서 만든다. 공연자의 움직임이 관객과 곧바로 교감하기 위해서는 패션이나 소품, 조명과 같은 디자인 요소가 정확하게 연기와 결합되어야 되기 때문이다. 태양의 서커스가 다른 공연과 크게 수준차이가 나는 분야 중 하나다.

스코틀랜드 양조장의 위스키 저장고. [사진 박진배]

스코틀랜드 양조장의 위스키 저장고. [사진 박진배]

음식 또한 수제의 전통과 함께 발전해 왔다. 7세기부터 프랑스 모(Meaux) 지방의 수도원에서 만들던 치즈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한 브리(Brie) 치즈의 원조가 되었다. 신부님들이 손으로 빚었던 수제맥주 역시 수도원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음식에 관해서 수제에 대한 관심과 존중이 지금처럼 높았던 때가 없었다. 풍요롭지 못했던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저렴한 가격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공장제품들이 쉬운 해답이었다. 스팸, 콜라, 공장 제빵, 라면 등을 판매하는 시장은 지금도 크지만 선호되는 건 아니다. 현재는 각종 수제 음식들, 전통술, 유기농과 같이 건강한 식재료를 올바른 공정을 거쳐 손으로 빚고 만드는 먹거리가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스페인산 하몬(Jamon)이나, 방목으로 키운 소고기, 자연에서 채취한 식재료에 비싼 값을 지불하는 것은 그 시간과 노력에 대한 인정, 신뢰, 그리고 존경이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패스트푸드가 많지만 한편으로 슬로 푸드를 지향하는 것, 좋은 에스프레소 기계가 있어도 핸드드립 커피를 찾는 것도 이런 현상의 일부다.

반복 작업으로 숙련된 제품을 만드는 장인들은 쉽지 않은 기술을 근육과 손끝으로 전수해 가며 전통을 이어 왔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를 좇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세상과 거기서 만들어 내는 무언가는 나의 것이 아니고 그들의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해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자체를 존중할 뿐이다. “어떻게 구하고, 걸어서 얼마나 말렸고, 며칠을 기다려야 하고, 짜는 데 몇 땀이 필요하고, 숙련되기까지 몇 년의 시간이 걸리고 …”와 같은 설명은 늘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그 안에 지역, 재료, 기술, 시간, 역사에 관한 서사가 담겨 있다.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 배우는 기쁨도 따라온다.

북유럽 초등학교선 공예수업 꼭 포함

이탈리아 몬테풀치아노 마을에 전시된 신발을 이용한 공예작품. [사진 박진배]

이탈리아 몬테풀치아노 마을에 전시된 신발을 이용한 공예작품. [사진 박진배]

이상적이고 수준 높은 교육으로 정평이 난 북유럽 나라들의 초등학교에는 공예수업이 꼭 포함되어 있다. 간단한 제품이라도 만드는 과정의 경험을 통해서 그 소중함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런 교육으로 타인의 손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존중하는 습관과 안목이 길러진다. 오늘날까지도 북유럽의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이 하나의 중요한 장르로 유지되는 근본이다.

서양의 공예가들은 인정은 받았으나 그들에게 명예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나라는 국가무형문화재와 이런 기능을 보유한 인간문화재 제도를 통해서 그 가치를 존중하고 명예를 수여하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나전장, 매듭장, 악기장, 단청장 등 많은 분야가 수공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가 강세인 ‘국제기능올림픽대회’의 다양한 종목들도 수작업 관련 분야가 많다. 우리는 심지어 수선분야에서도 거의 세계 최고의 손기술을 자랑하는 나라다. 이런 저변은 세계적 경쟁력을 갖는다. 허영과 사치에는 미래가 없다. 하지만 격(格)과 질(質)에는 미래가 있다.

요즈음 선망하는 라이프스타일에서 소개되는 많은 분야가 수작업과 관계가 있다. 목공, 손으로 빚는 술, 정원 가꾸기, 공예 등이다. 많은 경우 사회적 위치를 이룬 사람들의 취미 역시 디지털이 아닌 아날로그다. 독서, 와인, 여행, 음식, 음악 등이 그렇다. 손으로 만든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이 바탕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정성껏 만든 결과물을 사용할 때, 바라보며 잠시 생각을 해 보면 좋다. 장인의 손길과 애정이 느껴져 그 대상과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아무도 갖고 있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기분도 특별하다. 그곳에 타인의 노력과 인생에 대한 배움과 존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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