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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나는 무엇인가” 15세 또는 40세 되면 던져야 할 질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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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73) 

중세 유럽에서 아더왕 이야기는 중요한 문학적 주제였다. 그 중에서도 ‘성배 찾기’는 즐겨 다루어졌는데, 성배(聖杯, The Holy Grail)란 성스러운 잔(그릇)이라는 뜻으로, 예수가 최후의 만찬 때 사용했던 잔이며, 십자가에 매달린 채 피 흘릴 때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그 피를 받은 잔이기도 하다. 요셉은 이 잔을 들고 영국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이후로 이 잔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이는 중세의 수많은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 ‘잃어버린 신성한 것’에 대해 로버트 A. 존슨은 그의 저서 『HE』에서 남성들이 일생을 찾아 헤매는 원형으로 설명한다. 이 책에서는 특히 어부왕(fisher king)과 파르지팔의 신화를 중심으로 한 ‘성배 찾기’에 대해 풀이했다. 숲속 집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평온하게 살던 파르지팔이 십육 세가 되었을 때 화려한 기사 무리를 보고 반해 자신도 기사가 되겠다며 집을 나섰다. 여기에 등장하는 어부왕은 젊은 시절 한때의 실수로 큰 상처를 입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신음하는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온전할 리 없어 그의 왕국 또한 피폐해져 있었는데, 어떤 위대한 기사가 찾아와 결정적인 질문을 했을 때만 상처가 치유될 수 있었다.

그 결정적인 질문이란, ‘성배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자료와 번역에 따라 번역은 조금 다르지만, ‘잃어버린 성스러운 것’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은 자기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사춘기나 청년 시절에 그 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정말 안정적으로 잘 운영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그렇지 못하다. 중년이 되어서야 ‘질문할 힘’이 생기기도 하고, 제대로 질문할 줄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 덕에 그 이후 삶을 생각하는 기준을 마련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파르지팔이 5년 혹은 20년 이상 모험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찮은 인간의 삶일지라도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든 이야기의 논리상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파르지팔이 숙명의 기사가 되었던 것인데, 이로 인해 파르지팔의 20여 년에 걸친 모험 이야기는 이러저러하게 이름과 모양새를 달리하면서 유럽 전역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름도 지역에 따라 표기와 발음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독일에서는 파르지팔(Parzifal) 또는 파르치팔(Parzival), 프랑스어로는 페르스발(Perceval)이라 불리고, 바그너의 오페라로 널리 알려진 덕분에 파르지팔(Parsifal)로 흔히 표기되기도 한다.

파르지팔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주요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연기상 등 성과를 거둔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 '피셔킹'.

파르지팔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각색하여 주요 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연기상 등 성과를 거둔 테리 길리엄 감독의 영화 '피셔킹'.

파르지팔이 모험을 떠나는 시작 지점에 눈길이 간다. 열대여섯 살이 될 때까지 그의 삶은 평온함 자체였다.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던 그는 어느 날 외부에서 만난 멋진 남자들에게 반해 세상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사춘기 무렵 아버지 아닌 다른 남성, 그것도 꽤 멋진 남성의 이미지는 이렇게 한 남성의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결국 그것이 이 소년으로 하여금 그때까지의 안온한 삶에서 벗어나게 이끌었다. 집을 떠나 세상으로 향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닌지라, 더구나 오로지 아들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어머니에게는 정말 큰 충격이어서, 이 어머니는 아들이 떠난 이후 슬픔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나고야 만다. 이 어머니의 이름은 ‘가슴에 사무치는 슬픔 (Heart Sorrow, Herzeleide)’으로 표기된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이렇게 ‘슬픔’과 자주, 강력하게 연관되기도 하는 것 같다. 그것은 동서고금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길 떠나는 아들에게 옷을 한 벌 해 입힌다. 그런데 이 옷 모양이 특이하다. 책에 따르면, 원통형의 옷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드럼통 같은 모양의 옷을 입혔다는 건데 이 아들은 기사가 된 뒤에도 충실하게도 이 옷 위에 갑옷을 입었고, 절대 어디에서도 함부로 질문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새겨듣느라, 어부왕의 궁전에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바람에 시기를 놓치고 모험을 계속하게 되었다.

남성의 삶에서 어머니, 어머니 아닌 다른 여성의 존재란 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파르지팔의 이야기를 보면 될 것 같다. 파르지팔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다짐이나 집착 등으로 인해 아들의 앞길에 문제가 생긴 경우라면, 우리 이야기에서는 이 지면을 통해 여러 번 다룬 바 있듯, '선녀와 나무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천마를 타고 하늘나라에서 지상으로 어머니를 뵈러 온 나무꾼에게 어머니는 따뜻한 죽 한 그릇이라도 먹이려고 하였고, 그 어머니의 청을 거절하지 못한 ‘착한’ 나무꾼은 그걸 받아먹으려다가 지상에 발을 디디면 안 된다는 금기를 지키지 못해 다시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파르지팔은 모험 기간이 늘어나긴 했지만 다행히 다음 여정이 계속될 수 있었다. 결국 어부왕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해내긴 했지만, 이는 현자 구르몽이 제시한 ‘어떤 여성에게도 유혹을 해서도 안 되고 유혹을 당해서도 안 된다’는 금기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정 속에서 절세미녀 블랑시 플레르와 인연을 맺기도 하고, 그 대척점에 있는 추녀를 만나 또다시 위기를 맞기도한다. 네 다리를 모두 절뚝이는 노새를 타고 아더왕 궁정의 축제에 나타난 그 추녀는 아마도 마녀가 형상화한 캐릭터일 것이다.

이 추녀가 파르지팔이 과거에 저질렀던 모든 과오와 어리석음을 들춰내는 바람에 파르지팔은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진다. 첫 번째 위기는 세상에 눈뜨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흔들리는 사춘기 때 찾아왔다. 이후 모험을 계속하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사십 세가 넘은 중년이 되었을 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 추녀와의 대면이 이루어지는 두 번째 위기가 닥친다. 크게 성공한 남성일수록 스스로의 가치와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저자 로버트 존슨의 설명인데, 꼭 큰 성공을 이룬 이가 아니더라도 중년의 위기라는 것은 이 추녀와의 만남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삶의 운치는 사라지고 해답 없는 질문들이 그를 괴롭히는’ 상태. 이때 남성들은 추녀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새로운 미녀를 찾아 나서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고 하지만, ‘이 남성이 자신의 어두운 요소들과 먼저 화해하지 않는다면’ 어떤 새로운 미녀도 그 암울함으로부터 남성을 구해낼 수는 없다.

우리 옛이야기에서도 중년의 남성은 기존 질서의 완강한 수호자이기도 하지만 종종 흔들림의 아이콘이 되기도 한다. 간혹 책만 읽으며 집안 살림엔 도통 관심이 없는 한량 같은 이들이 등장하기도 하고, 나이 사십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간 채 가난한 처지를 면치 못한 이들이 이렇게 살 바에야 그냥 죽는 게 낫다며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가정을 이루고 살았더라도 그 부양의 책임감에 짓눌린 남성은 목매려고 산속에 들어갔다가 지네각시와 조우한다. 지네각시와의 만남은 이 남성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였으며, 이 남성은 덕분에 관계에 대한 진전된 사고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는 또한 기존 가족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사건이기도 하였다. 네 다리를 모두 절뚝이는 노새의 이미지는 어느 것도 온전하게 해내지 못하는, 전혀 균형을 찾지 못한, 위험천만한 상태를 나타냈다. 그런 노새를 타고 나타난 추악한 외모의 여성이란, 남성의 가장 어두운 면을 나타내는 것이겠다. 그런 면에서 지네각시의 혐오스러운 외형 역시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여지가 충분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파르지팔’ 장면. [사진 The Metropolitan Opera]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파르지팔’ 장면. [사진 The Metropolitan Opera]

이제 다시 파르지팔이 어부왕의 궁전에서 진작에 던졌어야 할 질문으로 돌아간다. ‘성배는 누구를 위하여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혹은 남성이 애초에 잃었던 삶의 진실, 영적인 최고급의 어떤 것, 신성한 것, 일생을 찾아 헤매야 하는 답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당신은 어찌하여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당신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일 것이다.

질문의 생김새가 꼭 불교의 원초적 물음과 같다. 이 삶의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것은 또한 불교뿐만 아니라 세상 어떤 종교든 반드시 묻고 답해야 하기도 하겠다. 『HE』에서 다루는 파르지팔의 신화는 남성의 심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실상 결국 인간의 삶에 대한 전반적인 성찰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생을 어떤 질문을 찾아 헤매곤 한다. 그것은 ‘나’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 꽤 신성하기도 한 영적인 어떤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겠다. 어머니가 손수 짜준 옷을 벗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없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동서고금의 수많은 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 성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나의 어린 시절을 감당해 주었던 양육자의 보호 아래에서 벗어나 저 세상 한가운데로 내던져졌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양육자로서의 역할에 골몰하고 있는 이라면, 이것이 삶의 진실임을 서늘하게 깨우쳐야 할 것이다. 끝끝내 ‘보호하는 역할’에만 집중한다면 여전히 내 손으로 손수 짠 옷을 자녀에게 입힌 상태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며, 그 덕분에 자녀는 정말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인생에 던져야 할 질문을 제때 적절하게 던지지 못함으로써 흔들림의 시간, 즉 모험의 시간, 『HE』에서 표현하기로는 ‘건기(乾期)’의 시간을 연장할 뿐이다.

열다섯, 혹은 마흔 살의 어느 때 우리에게는 ‘질문’해야 할 기회가 마련된다. ‘성배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내 삶의 지향에 대한 의문이며 해답이다. 이 질문을 제때 던지지 못한 채 안온한 삶을 연장하는 데에만 골몰한들, 반드시 흔들림의 시간은 찾아온다. 세상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고 특별히 즐기는 일도 없고, 열심히 하는 일도 없이 평온한 삶을 지속해 온 한 친구가 최근 어떤 일로 인해 멘탈의 근간이 뒤흔들리는 경험을 하고 완전히 나가떨어져 있다. 온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는 알러지 현상을 겪으며, 이 친구는 생전 처음 겪는 세상의 어지러움에 온 정신이 나가 있다. 열심히 친구의 혼돈에 공감하며 격려를 보내다 문득 사회생활을 치열하게 해온 이라면 사실 이 정도 일은 ‘늘상’ 겪는 일이기도 한데, 이 친구 참 그동안의 삶이 지나치게 평온했구나 싶기도 하다. 물론 이 친구에게도 양육에 지쳐, 남편과의 관계에 지쳐 힘들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것이 자기성찰의 길, 혹은 자신을 단단하게 단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던 건 아닌가 싶다. 파르지팔이 던져야 했던 질문, 열다섯 혹은 마흔 살에 직면했어야 했던 질문, 성배는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은, 나 자신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겠다. 중세 기사들이 그렇게도 찾아 헤맸던 성배는 꽤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긴 하지만, ‘잃어버린 신성한 것’이란 결국 나 자신, 내 존재의 본질과 연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옛이야기가 전하는 진실이란, 인생에 대한 성찰과 반드시 연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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