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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100년 전 영국 귀족사회 생생하게 살려낸 영리한 블랙코미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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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웃을 일 없는 세상에 모처럼 큰 웃음을 주는 무대가 열렸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다. 2014년 토니상을 비롯한 브로드웨이 4대 뮤지컬 어워즈에서 최우수 뮤지컬상을 싹쓸이하는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고, 2018년 국내 초연 당시 누적 관람객 수 6만 3000명, 객석 점유율 92%를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한 작품이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도 올해만 신작 ‘그레이트 코멧’을 비롯해 ‘헤드윅’, 연극 ‘완벽한 타인’ 등을 내놓으며 선전하고 있는 공연제작사 쇼노트가 겨울 레퍼토리로 밀고 있는 작품이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영국 작가 로이 호니만의 소설 『이스라엘 랭크: 범죄자의 자서전』(1907)과 영화 ‘친절한 마음의 화관’(1949)을 원작 삼았다.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 평생 가난하게 살아온 주인공 몬티 나바로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고귀한 명문가인 다이스퀴스 가문의 여덟 번째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2022년 2월 20일까지 #광림아트센터 BBCH홀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사랑과 살인’이라는 부제처럼 가난과 신분 때문에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해 후계자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연쇄살인극’이지만, 조금도 잔인하거나 공포스럽지 않다. 100년 전 영국 귀족 사회의 허상과 상류층의 위선, 파렴치한 인간 본성까지 영리하고 신랄하게 꼬집은 블랙코미디가 2021년의 한국 사회에도 통하는 걸 보면 언젠가 ‘코미디 뮤지컬의 고전’이 될 법하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그런데 블랙코미디란 게 사회상을 풍자하다보니 번역이 쉽지 않은 일이다. 대극장 라이선스 뮤지컬은 노래와 춤 같은 볼거리 즐길거리를 챙기면서 자연스런 웃음 포인트까지 살려야 하니 더욱 그렇다.
‘젠틀맨스 가이드’는 100년 전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의 재미를 살리기 위해 대사가 아니라 재치를 번역한 듯 하다. “지금 바로 PCR 검사를 받고 이상이 없으면 내일 아침에 출근하도록”“(거리두기가) 풀린 지 얼마나 됐다고 모이고 그래” 등 팬데믹 상황을 깨알 풍자하고, 최근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출연했던 몬티 역 유연석을 향해 “유연하면서도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군. 슬기로운 은행 생활을 하기 바라네”같은 주옥같은 애드립에 빵빵 터지다 보면 ‘공연은 펄떡펄떡 살아있는 것’이라는 오래된 명제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유연석 뿐 아니라 이석훈, 고은성, 이상이, 오만석, 정성화, 이규형, 정문성 등 초특급 캐스팅도 화제다. 몬티 역의 한창 핫한 젊은 배우들도 엄청난 대사량을 소화하며 극의 전개를 이끌지만, 대극장 뮤지컬로선 보기 드물게 1인 9역으로 ‘열일’하는 ‘다이스퀴스 패밀리’를 맡은 배우들 연기를 보는 재미가 백미다. ‘왜 가난하고 그래’라는 대표 넘버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개돼지로 아는 에덜벌트 백작을 비롯해 자선사업가로 셀프 포장한 사교계 여왕, 은행장 아버지만 믿고 설치는 안하무인 2세 등 닮은 듯 다른 남녀노소 9가지 캐릭터 모두 개성을 살려내야 하는 고난도 작업이다.

그럼 대극장 뮤지컬에서 굳이 1인 9역으로 설정한 이유가 뭘까. 배우의 존재감을 200% 보여주는 연극성의 극대화 차원을 넘어, 한 사람 안에 9명의 내면이 다 들어있다는 알레고리로 보인다. 몬티가 백작가문의 피붙이지만 8번째 후계자로서 ‘하이허스트성’에 입성하기까지 부자 친척들을 하나하나 제끼는 ‘도장깨기’ 과정에서 배꼽잡는 포인트가 바로 부자들의 멍청한 탐욕이다. 굳이 손을 더럽힐 필요없이 조금만 덫을 놔두면 제발로 걸려든다. 목사인 이제키엘은 스스로 올라간 교회 지붕 꼭대기에서 손을 안 잡아 줬을 뿐이고, ‘양봉성애자’ 부동산재벌 헨리는 벌떼의 습격을 자초한다.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뮤지컬 '젠틀맨스 가이드' [사진 쇼노트]

백작으로 가는 여정에 단 하나 걸림돌이 여자 문제인 것도 리얼하다. 이 여정의 시작점인 애인 시벨라와 그 여정의 조력자 피비 사이에서 우왕좌왕 진땀 쏟는 명장면에 큰 박수와 공감이 터져 나온다.
마지막 고비는 자신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손이 해결해주지만, 백작이 되고 나니 내 뒤에도 누군가 줄을 서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 때 무릎을 치게 된다. 결국 몬티도 다이스퀴스 패밀리 줄초상 대열에 끼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복선으로 막을 내리는 것이다. 이 시대 ‘하이허스트성’의 주인이 되려는 사람들에게도 울림을 주는 엔딩이다. 공연은 2022년 2월 20일까지.

유주현 기자/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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