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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쪽같은 실리콘 지문, 서류 다 뗐다…미션 임파서블급 사기

중앙일보

입력

지문은 유형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왼쪽부터 활 모양의 궁상문, 달팽이 모양의 와상문, 말발굽 모양의 제상문. [중앙포토]

지문은 유형에 따라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왼쪽부터 활 모양의 궁상문, 달팽이 모양의 와상문, 말발굽 모양의 제상문. [중앙포토]

생계형 도둑인 스캇 랭(폴 러드)이 딸의 양육비를 구하기 위해 거물 CEO의 집 지하 금고를 털러 나선다. 문제는 ‘지문 인식 문’. 난관 앞에서도 스캇은 테이프로 손잡이에서 지문을 확보해 접착제를 이용해 지문을 본뜬 뒤 문을 열었다. 영화 ‘앤트맨’(2015년)에서 주인공의 기지와 순발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 속 공범들도 “대단하다”고 감탄한 그 기술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시시한’ 수준이다.

실리콘 인조 지문으로 남의 땅 거래 

영화처럼 지문 인식을 뚫은 사기단이 잇따라 적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용인동부경찰서가 사기와 공문서·사문서 위조 등 혐의로 구속한 A(60)씨 일당은 접착제가 아닌 실리콘을 이용해 인조 손가락 지문 등을 만들었다.

A씨 등은 지난 3월 다른 사람 소유의 제주도 땅을 20억원에 팔면서 계약금으로 5억원만 미리 받아냈다. 위조된 지문으로 인감증명서 등을 발급받았기에 사기 거래가 가능했다. 잔금을 받으려던 중 진짜 땅 주인에게 ‘땅에 근저당이 설정됐다’ 법원 등기가 발송되면서 덜미를 잡혔지만, 피해가 더 클 수 있었다.

 실리콘 지문을 이용해 주민센터 무인발급기에서 문서를 발급받는 부동산 사기 일당. 용인동부경찰서

실리콘 지문을 이용해 주민센터 무인발급기에서 문서를 발급받는 부동산 사기 일당. 용인동부경찰서

출퇴근 지문 인식 조작 등 범죄 잇따라

지문은 일란성 쌍둥이도 다르다고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2000년 들어 휴대전화나 출입문 등 보안이 요구되는 곳에 지문을 이용한 생체인증 시스템이 도입됐다. 그러나, 이런 지문 인식을 뚫는 기술도 ‘더불어’ 발전했다. 2019년엔 실리콘 지문을 이용해 출퇴근 기록을 조작한 군의관 8명이 군 당국에 적발되기도 했다. 일부는 이 수법으로 야근하지 않고도 야근 수당을 챙겼다. 그보다 앞선 2015년엔 경북지역 일부 소방관들이 짜고 실리콘으로 만든 가짜 지문을 출퇴근 확인키에 찍는 방식으로 초과 근무 수당을 챙겨 해임되기도 했다.

2014년 서울 금천경찰서는 실리콘 위조 지문을 위조해 부동산 대출 사기를 벌인 이들을 붙잡았다. 이들도 A씨 일당처럼 대역을 내세워 위조한 신분증과 실리콘 지문 등을 이용해 발급받은 공문서로 범행했다. 신분증과 지문 위조는 중국에 있는 위조범에게 의뢰했다.

이번에 경찰에 적발된 A씨 등은 신분증 사본의 지문을 위조한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 관계자는 “본격적인 범행을 앞두고 위조한 신분증과 지문을 가지고 무인민원발급기와 주민센터 창구에서 실제로 서류를 뗐는데 모두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인터넷에 지문 복사 방법 소개돼

지문 위조는 이미 인터넷 등에서는 익숙한 일이 됐다. 실리콘·점토 등을 이용한 지문 복사 방법을 소개하는 글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문 복사용 실리콘을 판매하는 사이트도 있다.

신분증 없이 손바닥 정맥을 이용한 바이오 인증 정보를 도입한 한국공항공사의 무인 스피드게이트. 한국공항공사

신분증 없이 손바닥 정맥을 이용한 바이오 인증 정보를 도입한 한국공항공사의 무인 스피드게이트. 한국공항공사

위조 위험은 높아졌지만 정작 당사자가 지문을 이용한 기기를 못 쓰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기기 대부분이 최초 등록한 지문에 따라 작동하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에 상처를 입거나 지문이 닳아 흐릿하면 정작 본인의 지문을 인식 센서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임종인 고려대 교수(정보보호대학원 사이버국방학과)는 “개인 각자가 정보 유출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하겠지만, 민원발급기나 출입기록 등 개인정보를 다루는 기기엔 쉽게 위조할 수 없는 생체인식 방법을 복합적으로 적용해 보안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위·변조가 쉬운 현재의 플라스틱 신분증을 개인정보와 각종 인증키 등 주요 정보를 IC칩에 저장하는 전자주민증 등으로 바꾸는 것도 개인정보 유출을 막는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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