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피엔 '벤츠'가 흐른다"

중앙일보

입력

슈투트가르트에서 만난 피터 스피츠(Peter Spieth.54) 씨는 "가업(家業)을 잇고 있다"고 말했다.

집안이 경영하는 사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몰두하고 있는 일은 가업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3대가 평생을 헌신해 완성해가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독일인의 자부심, 메르세데스벤츠의 전통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는 메르세데스벤츠를 조국의 자부심과 연결시켰다.

메르세데스벤츠는 왜 '명품'으로 평가받는가. 해답을 얻기 위해 슈투트가르트행 비행기에 오르며 떠올렸던 몇가지 추측들이 모두 틀린 셈이었다.

메르세데스벤츠를 단지 '고급차 중 하나'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산업 종주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브랜드에 투영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거창했던 것은 아니다. 유년기의 스피츠는 그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뿐이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S클래스의 뒷좌석에 앉아 있으면 친구들이 모두들 부러워했다. 철이 들어서도 존경심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 확실해 졌다. 아버지가 패전(敗戰)으로 무너진 조국의 경제를 일으키는데 일조했다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면서부터다.

슈투트가르트를 가로지르는 네카(NeKar)강에서 아버지가 들려주신 얘기가 귓가에 선하다. "할아버지는 고트립 다임러가 만든 회사에서 최초의 자동차를 같이 만드신 분이었단다." 라인강을 향해 흐르는 슈투트가르트의 젖줄을 바라보며 그의 목표는 "선대의 가업을 잇겠다"는 한가지로 굳어졌다.

피터 스피츠 씨는 현재 메르세데스벤츠 클래식센터장을 맡고 있다. 클래식센터는 한마디로 보물창고다. 자동차가 발명된 이후 메르세데스벤츠가 생산한 거의 대부분의 대표모델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최근에는 양산이 중단된지 20년 이상된 모델들을 '올드타이머(Old-Timer)'로 정하고 개인적인 소장은 물론 실제 도로에서도 달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 미리 보존해 두었던 도면에 따라 고객이 원하면 완벽히 수리하고 재판매를 대행해 주는 식이다.

스피츠 씨는 지난 1979년 17세의 나이에 다임러벤츠의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다임러벤츠가 크라이슬러를 합병한 이후 그는 여러 자리에서 경험을 쌓은 후 지난 2001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독일과 같은 제2 클래식센터를 세우기 위해서다. 올해 초 새 클래식 센터가 문을 여는 것까지 지켜본 후 그는 독일로 돌아와 클래식센터 본부장이 됐다. 앞서 개관한 제2 센터 건립을 주도한 공로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가 클래식센터에 특별한 의욕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자신이 일생을 바치고 있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전통과 역사를 보존하는데 앞장서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은 열정이 만들어낸 유전형질(DNA)"이라고 강조했다.

스피츠 씨가 말한 '유전형질'은 메르세데스벤츠 본사가 있는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올 초 본사 맞은편에는 메르세데스벤츠 박물관이 새로 개관했다. 이 건물은 웅장한 규모와 초현대식 시설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독특한 외형이 압권이다. 얼핏보면 예술품 같지만 자세히 보면 DNA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관람객들은 최소 2시간이 소요되는 박물관 투어를 통해 120여년 자동차 발전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살펴볼 수 있다. 물론 이 역사는 벤츠의 사사(社史)를 위주로 서술된다. 꼭대기로 올라가 이중 나선 구조를 형상화한 전시 루트를 통해 내려온다. 곳곳에는 '세계최초'로 수식된 벤츠의 전통과 창조성이 살아 숨쉬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관계자들은 이 박물관을 "최고를 향한 열정의 유전자"라고 설명했다. 열정이 만든 유전자. 한동안 질문을 잇지 못했다. 전통이 낳은 가치. 그들이 확보한 선순환 구조가 부러웠다.

신화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창조적인 개척자를 미화하는데서 출발하는게 신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주국의 신화를 만들고 유전형질을 확보한 그들은 이제 전통을 다지는데 열중한다.

국내에서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관계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본사 사람들은 당장 실적을 올릴 영업 방법에는 연연하지 않아요. 대신 한국의 수입차 시장이 얼마나 커질 것인가에 관심이 많죠. 그들은 '고급차 소비자들은 최종적으로 메르세데스벤츠를 찾게 돼 있다'고 말한 답니다."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한 이후 이 말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부심에서 나온 '가치'는 공산품이 돼 버린 자동차를 아주 특별한 대상으로 격상시켰다.

세계인들이 세꼭지 모서리의 별, 3포인티드 스타(3Pointed Star)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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