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조선 왕비 죽였다” 시해 가담 일본 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명성황후(1851~1895, 1866~95 고종의 왕비, 18 97년 황후로 추존) 시해에 직접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우리가 왕비를 살해했다”고 밝힌 편지가 126년 만에 발견됐다.

이 편지는 당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乙未事變)이 국가 차원에서 이뤄진 게 아니라던 그간의 일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16일 아사히신문은 당시 일본의 조선공사관 영사관보(補)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의 것으로 보이는 편지 8통을 발견했다고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도쿄제국대 법대를 마치고 1894년 일본 최초의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외교관으로, 당시 일본인으로 이뤄진 시해 실행단의 일원이었다.

일본 외교관 1인칭 시점 서술 “생각보다 시해 간단해 놀라”

호리구치

호리구치

편지를 받은 사람은 니가타(新潟)현 나카도리무라(中通村·현재 나가오카(長岡)시)에 살던 그의 고향친구 다케이시 사다마쓰(武石貞松)다.

발견된 편지는 1894년 11월 17일과 사건 뒤인 1895년 10월 18일 사이에 각각 작성된 총 8통이다. 이 중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작성된 여섯 번째 편지에 현장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됐다.

호리구치는 이 편지에서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弑)했다”고 썼으며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놀랐다”는 소감을 붙였다. 오쿠고텐은 저택 뒤쪽의 침전과 여성 공간을 가리키는 일본어다. 경복궁 후원 건청궁(乾淸宮)의 왕비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는 곤녕합의 누각인 옥호루(玉壺樓)에서 시해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고종은 건청궁의 침전인 장안당(長安堂)에 감금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서한은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사는 우표·인지 연구가인 일본계 미국인 스티브 하세가와(長谷川·77)가 고물상에서 입수했다. 붓으로 흘려 쓴 글자는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2011년 태학사 번역 출간)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씨가 판독했다. 아사히는 “편지가 보관됐던 곳으로 여겨지는 장소나 기록된 내용, 소인, 봉인을 만든 방법 등을 볼 때 호리구치의 진필(친필)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김문자씨는 “사건의 세부(내용)나 가족에 관한 기술 등을 봐도 호리구치의 진필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는 “현역 외교관이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알려지는 문면(文面·편지에 적힌 문구, 표현에서 보이는 취지)에서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며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세부사항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가치 높은 자료”라고 평가했다.

일본 근대사와 한·일 관계사 전문가인 나카쓰카 아키라(中塚明) 나라여대 명예교수는 아사히에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조선 침략 과정에서 일어났다”며 “당시 일본이 조선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사건으로부터 12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당사자로부터 1차 자료가 나온 것은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범죄 현장의 일본 현직 외교관이 1인칭 시점으로 자신의 범행 사실을 인정한 편지가 발견된 것은 을미사변이 일본의 국가범죄라는 명백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이 명예교수는 “지금까지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대원군의 뜻에 따라 일본인이 도운 것이며, 실행단은 낭인 등 민간인이었다’고 주장해 왔다”고 말했다.

을미사변은 육군 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三浦梧櫻·1847~1926)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사건이다. 1876년 체결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에 따라 관련 일본인들은 일본에 넘겨져 재판을 받았으며, 미우라와 호리구치 등 48명은 증거 불충분 등을 이유로 전원 무죄를 받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