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체임 땐 경영활동 제한? 법무부조차 "외국선 찾기 힘든 사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감사위원 1인 이상을 이사와 분리해 별도 선출하고 최대 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중앙포토]

지난해 12월 국회 본회의에서 감사위원 1인 이상을 이사와 분리해 별도 선출하고 최대 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됐다. [중앙포토]

# 지난 3월 대기업 H사에선 감사위원 선출을 놓고 분란이 일었다. 형제간 경영권 다툼에서 밀려난 인사가 자신이 미는 인물을 감사위원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다. 경영계에선 이를 두고 감사위원 1인 이상을 이사와 분리해 별도 선출하고, 최대 주주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상법 개정안을 악용한 사례로 꼽는다. 재계 관계자는 "소수 주주의 의견을 반영하자는 취지로 만든 법을 경영권 분쟁 세력이 엉뚱하게 이용한 것"이라며 "기업 이사회가 투기 세력이나 경영권 공격 세력에 장악돼 휘둘릴 위험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규제 완화·지원 조항 ‘전무’

21대 국회에서는 이처럼 기업의 경영권이 위협받을 수 있는 지배구조 관련 법안들을 잇따라 쏟아내고 있다. 본지가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함께 21대 국회에 계류돼 있는 기업규제 조항 264건을 분석한 결과 규제와 처벌을 신설·강화한 조항(240건)이 기업을 지원하고 규제를 완화하는 조항(24건)의 10배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중에서도 소유·지배구조 관련 조항은 규제나 처벌을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내용이 64건이고 규제를 완화하거나 지원하는 조항은 ‘0’건 이었다.

한국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이사회 구성 요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한국 자산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이사회 구성 요건.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가뜩이나 기업 어려운데…” 

국회에 발의된 법안 일부는 법 체계에 어긋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어 기업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지난 7월 국회 법사위에는 임금을 체불한 회사의 경영 활동을 제한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이 상정됐다. 법무부조차 “임금체불회사의 경영활동 자체를 제한하는 입법례는 다른 나라에도 찾아보기 어렵다"며 "상법은 회사의 조직과 운영에 관한 기본법이므로 임금체불 같은 근로기준법 위반 사항을 상법에 규정하는 건 법체계에 부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냈을 정도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한모(70)씨는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사정이 괜찮은데도 작정하고 임금을 안 주는 곳은 정말로 거의 없을 것"이라며 "임금을 못 줄 정도라면 정말 도산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일텐데 경영활동을 막는 건 회생 노력도 하지 말고 그냥 앉아서 빚잔치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그는 "특히 요즘 원자재가나 해상운임 등이 너무 올라 하루하루가 고비의 연속"이라며 "그렇게 애쓰지 말고 그냥 문 닫으라는 말인지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달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중앙포토]

지난달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중앙포토]

경영권이 직접 위협 받게 되는 내용을 담은 법안도 있다. 지난 2월 국회 법사위에 상정된 상법 개정안은 피출자회사의 지분 30% 이상을 보유한 지배출자회사의 주주가 피출자회사의 이사에 대해 책임추궁 소를 청구할 수 있게 하는 다중대표소송제, 회계장부열람권의 허용대상 범위를 피출자회사로 확대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이미 지난해 상법 개정을 통해 지분 50%를 초과하는 모자회사 관계에서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허용됐는데 이 요건을 더 느슨하게 푼 것이다. 하지만 이를 투기자본이 이용하면 경영권이 위태롭게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다중대표소송 남발을 유발할 수 있는 대표적인 법안”이라며 “또 회계장부열람권은 3% 지분 이상을 보유한 주주에게 엄격한 요건 하에 허용하는 것인데 주주의 권한을 침해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다중대표소송 관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다중대표소송 관련.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국회 법안 평가할 '법안평가원' 만들자”  

21대 국회에서 발의한 법안 중에는 전자투표제나 서면투표제 실시를 의무화하자는 내용도 있다. 주주 참여를 독려하자는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기업의 자율에 맡기지 않고 ‘의무화’를 규정한 점, 기업의 전자투표 도입율은 높아졌지만 실제 주주들의 전자투표 행사율은 극히 낮다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점 등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정기주총 전자투표 행사율(총 발행주식 수 기준)은 2018년 3월 3.92%, 2019년 3월 5.04%, 2020년 3월 4.67%를 기록했다. 일부 주주들은 전자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금방 샀다 되파는 이른바 '단타 매매'를 많이 하고 회사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전자투표를 하라고 하면 귀찮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서면투표는 수많은 주주를 대상으로 참고서류와 투표서를 보내고 취합까지 하려면 예상치 못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다. 한 상법 전문가는 “대기업들은 서면투표를 하려면 우편 비용만 수 억이 들어갈 수도 있다"며 "더구나 상장사들이 비슷한 시기에 주주총회를 하며 서면투표지를 보내면 우편대란이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지난 3월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 전자투표제가 도입됐다. [사진 뉴스1]

지난 3월 수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삼성전자 정기주주총회. 전자투표제가 도입됐다. [사진 뉴스1]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전체주의 국가도 아닌데 개별 사기업에게 지배구조를 법으로 강제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며 “기업에는 도움이 안 되고 뭐 하나 발의했다는 생색내기용 같은 법안이 많다”고 비판했다. 최 명예 교수는 "엉터리 법안은 기업과 국민 경제를 망칠 수 있는 만큼, 의원들이 내는 법안의 실현 가능성과 의미를 분석해 최악의 엉터리 법안, 최고의 법안을 뽑고 평가하는 법안평가원 설립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