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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총량제 만능론, 사다리 걷어차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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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코로나19의 충격으로 많은 상점이 폐업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서울 서대문구 한 상가에 붙어 있는 임대광고. [뉴스1]

코로나19의 충격으로 많은 상점이 폐업하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월 서울 서대문구 한 상가에 붙어 있는 임대광고. [뉴스1]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은 걸까. 급등한 집값 때문에 빚을 내고, 먹고살겠다고 식당 문을 여는 국민이 영 미덥지 않은 모양이다. 나라님이 보모 노릇을 자처할 태세다. 수단은 총량제다.

 늘어나는 가계 빚 관리에 돌입한 금융당국은 가계대출 총량제를 도입했다. 은행 등의 연간 대출 증가율을 5~6%대로 묶어 두는 것이다. 실수요 성격이 강한 전세대출의 예외를 인정하며 숨통은 터줬지만, 곳곳에서 한도 축소와 대출 중단 등이 이어지며 시장은 ‘대출 총량제 발작’ 중이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을 감당하려고 ‘영끌’ 행렬에 나서는 이들은 불안하다. 자칫 집값이 고꾸라지기라도 하면 ‘빚으로 지은 집’은 위태롭다. 빚 때문에 휘던 등골이 부러질 수도 있다. 그래서 국민을 어여삐 여긴 당국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최대한 빚으로 이르는 길을 막아섰다.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율이 24%에 이르는 ‘자영업 공화국’의 개미지옥인 음식점도 위험하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음식점 총량제’라는 아이디어를 거론했다. “마구 식당을 열어 망하는 것도 자유가 아니다” “하도 식당을 열었다, 망하고 해서 개미지옥 같다”는 게 이유다. 너도나도 식당을 하겠다고 뛰어드는 통에 아비규환이 됐으니 총량 관리라는 규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규제로 시장은 ‘대출 총량제 발작’
폐업 막겠다며 ‘식당총량제’ 발상
집 공급, 일자리 늘리기가 해결책

 가계와 자영업자 보호라는 명분은 물론 일리가 있다. 문제는 수단인 총량제다. 규제 당국의 입장에서는 손쉬운 관리 방안이다. 규제 당사자에게 총량제는 ‘사다리 걷어차기’의 동의어다. 금융당국의 총량 규제가 시작되며 대출 시장에 미리 깃발을 꽂은 이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다. 뜻하지 않게 뒤늦게 돈을 빌려야 하는 이들은 피가 마른다.

 자영업자 ‘폐업의 무한루프’를 막기 위한 음식점 총량제도 마찬가지다. 직업 선택의 자유 침해나 경쟁 구도 훼손까지 운운하지 않아도 음식점 문을 열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될 수 있다. 사실상 정부가 과점체제를 인정해 주는 셈이 되면 늦게 태어나서, 퇴직 시점이 늦어서 어찌하다 보니 뒤늦게 식당 주인이 되기로 한 이들은 바늘구멍을 뚫어야 할 수 있다.

 권리금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듯하다. “음식점 할 권리를 200만~300만원씩 받고 팔 수 있도록 하자”는 이 후보의 말대로다. 이미 식당을 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문턱을 높이며 신규 진입자들의 부담은 늘어나는 셈이다. 사상 초유의 ‘식당 청약제’까지 나올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현실화할 수 있다. 총량제 도입 전 투자 차원에서 미리 식당 하나 정도는 열어 두는 게 현명할 수도 있다.

 준비 없이 자영업의 길에 뛰어드는 무모함을 막고 싶다면 우격다짐 식의 총량제는 답이 아니다. 자영업자가 정글 같은 경쟁 속에서 살아남도록 최소한의 준비나 능력을 검증하는 면허제와 유사한 방식 등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

 총량제의 근저에 깔려 있는 논리는 ‘선량한 국가에 의한 선량한 규제’다. 보모가 아이들 돌보듯, 국민을 철저하게 돌보고 챙기겠다는 ‘보모국가(nanny state)’의 그림자가 어슷하게 비친다. 하지만 선량한 규제는 과보호나 개인의 선택에 대한 지나친 간섭으로 언제든지 비화할 수 있다. 사적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나라님의 측은지심을 비난할 건 아니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선량한 규제가 아니다. 상투가 아닐까 두려워하면서도 왜 영끌을 해서 집을 사는지, 망하면 길에 나앉을 수 있는 위험에도 왜 치킨집을 여는지 그 이유를 모두 잘 알고 있다.

 이 문제를 푸는 길은 살고 싶은 집을 공급하고, 식당을 차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은 채, 변죽만 울리는 거칠고 둔중한 칼만 휘두른다면 의도치 않았던 희생양만 양산할 뿐이다. 이미 어쩌다 대출 규제에 발목 잡힌 이들이 울고 있지 않나.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