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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시선

이순재의 ‘리어왕’, 우리의 ‘리어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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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현역 최고령 배우인 이순재가 연극 ‘이순재의 리어왕’ 포스터 옆에 서 있다. [뉴스1]

현역 최고령 배우인 이순재가 연극 ‘이순재의 리어왕’ 포스터 옆에 서 있다. [뉴스1]

86세 배우 이순재가 주연한 연극 ‘리어왕’을 지난달 30일 개막 당일 감상했다. 셰익스피어 원작을 통째로 옮긴 3시간 20분이 훌쩍 지나갔다.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연기자로 꼽히는 이순재의 열정이 도드라졌다. 백전노장 이순재도 세월이란 낫 앞에서 간혹 흔들렸지만 80세 리어왕의 겉과 속을 그만큼 맞춤하게 소화할 배우가 또 있을까 싶다. 비공식 ‘세계 최고령 리어왕’이라는 말도 들린다.

86세 현역배우의 3시간20분 무대

 ‘리어왕’은 폭풍, 해일과 같다. 권력을 두고 펼치지는 탐욕과 배신, 거짓과 진실, 악행과 복수, 부귀와 가난 등 이 풍진세상이 낱낱이 까발려진다.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는 듯하다. 연극을 본 뒤 원작을 다시 찾아 읽었다. 시대와 장소의 거리를 뛰어넘는 셰익스피어는 역시 셰익스피어였다.

 ‘리어왕’의 비극은 간명하다. 딸 셋에게 권력과 땅을 나눠주고 유쾌한 노년을 즐기려던 그가 뒤늦게 겪는 고통과 회한의 광시곡이다. 과장과 허언으로 아버지의 환심을 산 언니 둘과 달리 아버지에게 ”아무 할 말이 없다(Nothing)”는 셋째 딸의 진심을 몰라본, 즉 아첨과 사탕발림에 눈먼 통치자의 통렬한 반성문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에는 흥미로운 캐릭터가 있다. 몰락한 리어에게 독설을 퍼붓는 광대, 혹은 바보(fool)다. 극 중 유일하게 ‘모든 직언이 허락된’ 인물이다. 그가 리어에게 쏘아 댄다. “진실은 개 같으니까 개집으로 가야지. (…) 진실은 채찍을 맞고 쫓겨나야 한다니까.” 허위가 판치는 현실에 대한 풍자다. 또 이렇게 노래한다. “올해는 바보들 최악의 불경기다. 똑똑한 이들이 멍청해져 머리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등신처럼 흉내만 내니까.” 멀쩡한 이들이 바보처럼 굴어 진짜 바보가 할 일이 없어졌다는 역설이다.
 한국판 ‘리어왕’에선 공교롭게도 셋째 딸 코딜리아와 바보를 배우 이연희가 1인 2역을 한다. 둘 다 거짓과 맞서는 정직의 등가물쯤 된다. 정직이 죄인으로 전락한 시대, 코딜리아는 ‘말로만 기름 치는 기술’이 없어 리어와 혈연관계마저 끊기고 만다. 바보는 리어에게 이렇게 간청한다. “제발 이 바보에게 거짓말 가르쳐줄 선생 하나 붙여줘. 난 거짓말 배울래.”

권력 둘러싼 탐욕과 배신의 비극

 바보가 말한 ‘올해’를 2021년 한국에 대입해본다. 부질없는 접근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렇다고 마냥 동떨어진 것도 아니다. 대선 시즌에 터져 나온 온갖 허식과 빈말, 의혹과 변명, 궤변과 술수에 물려 대체 진실이 뭔지, 혹시 내가 바보가 된 것 아닌지 자문한 사람이 요즘 한둘이 아닐 것 같다. 연극에선 파국이 진정되고, 새날이 열리지만 우리는 여전히 컴컴한 동굴에 갇힌 모양새다. 최종 선출된 여야 대선주자들이 과연 어떤 비전을 제시할지 의구심만 커진다.

 이순재는 언론 인터뷰에서 ‘리어왕’의 골자를 3막 4장에 나오는 리어왕의 독백에서 찾았다. 폭풍우 몰아치는 광야에서의 깨달음이다. “이 폭풍을 견디는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아. 쉴 곳 없는 머리와 먹지 못한 허리와 숭숭 뚫린 누더기로 이 같은 계절에 어떻게 몸을 보전하느냐? 아, 이런 일에 난 너무 소홀했다. 허식이여. 치료를 받아라.” 정의와 공정을 입에 달고 다니고 정치인에 대한 이만한 비판도 드물 듯하다.

이순재 등 연극 '리어왕' 출연진들이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에 인사하고 있다. 박정호 기자

이순재 등 연극 '리어왕' 출연진들이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에 인사하고 있다. 박정호 기자

 극 초반 코딜리아는 두 언니와 작별하며 이렇게 경고한다. “시간은 숨어 있는 흉계를 드러내고, 감춰진 잘못을 창피 주며 비웃지요. 잘해봐요.” 이를테면 사필귀정이다. 내년 3월 대선까지 남은 시간에 우리 정치판에 짙 깔린 온갖 의혹이 정리될지 실낱 기대를 걸어본다. 최소한 ‘바보들의 불경기’가 더는 이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신뢰를 잃은 검찰ㆍ경찰에게도 “(제발) 잘해봐요”라고 당부하고 싶다.

대선 시즌의 거짓과 궤변 보는 듯 

 이제 유권자들의 시간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리어왕’ 속 바보가 돼볼 일이다. 더 현명한, 더 매서운 바보가 됐으면 한다. 더욱이 지금은 400년 전 셰익스피어가 살던 전제군주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셰익스피어는 흑사병 확산으로 극장이 폐쇄된 런던에서 ‘리어왕’을 썼다. 코로나19 재앙에서 단계적 일상 회복을 꾀하는 요즘, 역대 최악의 비호감 대선을 호감으로 바꿀 주인공은 눈뜬 시민밖에 없다.
 노배우 이순재의 분투에 박수를 보낸다. 연극에 나오는 ‘바보 같은 올곧음’이 시대에 자리 잡고, ‘법복과 털외투’가 악덕을 가리는 일이 없기를 고대한다. 그래야 ‘침묵하는 사랑’이 빛날 것이다. 참고로 재미난 통계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단어는 총 88만4647개(누적). 그중 사랑은 2259차례, 증오는 단 183차례였다. (빌 브라이슨의 『셰익스피어 순례』) 아쉽게도 정치인의 ‘가짜 사랑’ 통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