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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기 든 공포의 민원인…공무원은 목에 '비장의 무기' 걸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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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 9월 대구 중구청에서 실시한 '악성 민원 제압 훈련'. 공무원들이 악성 민원 발생 상황을 연출해 훈련하고 있다. 사진 대구 중구청

지난 9월 대구 중구청에서 실시한 '악성 민원 제압 훈련'. 공무원들이 악성 민원 발생 상황을 연출해 훈련하고 있다. 사진 대구 중구청

# 지난달 29일 경북 포항시청 대중교통과. 60대 남성 A씨가 염산으로 추정된 액체를 공무원에게 뿌렸다. 얼굴 등에 액체를 뒤집어쓴 공무원은 119구조대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공무원은 각막과 피부에 손상을 입고,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A씨는 포항시가 택시 감차 정책을 펼치자 “자동차 매매 물량이 감소했다”며 수차례 불만을 표시하다 이날 이름바 '액체 테러'를 했다.

# 지난달 20일 충북 청주시 서원구청. 행정처분에 불만을 품은 한 80대 민원인이 공무원을 찾아 “왜 벌금을 내야 하느냐”며 다짜고짜 뺨 2대를 때렸다. 마을 교량을 무단으로 훼손해 구청에서 원상복구 명령과 고발을 당한 B씨였다. 닷새 뒤인 지난달 25일엔 불법 주정차 단속에 항의하던 한 60대 민원인이 서원구청에 찾아와 임용 7개월 차 공무원에게 흉기를 집어 던졌다. 노점상을 하던 민원인은 불법 주정차로 4차례 적발된 데 격분해 범행을 저질렀다.

악성 민원인의 폭행·폭언 등 난동을 피우는 행위가 증가하고 있다. 2019년 3만8054건이던 악성 민원인의 난동 행위는 지난해 4만6079건으로 1년새 19.7% 늘었다. 류재홍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청주시 지부장은 "사무실을 찾아와 폭행·폭언이나 난동을 부리고, 스토킹 등 업무방해 행위를 하는 악성 민원이 끊이지 않고 있어 강력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단봉 등 호신용품 민원실에…공무원 '방어술'도 진화

경북 의성군 한 민원부서에서 공무원이 웨어러블 캠을 부착하고 근무하고 있다. 블루투스 장치처럼 목에 둘러져 있는게 웨어러블 캠이다. 촬영중 이라는 명찰이 눈에 띈다. 사진 경북 의성군

경북 의성군 한 민원부서에서 공무원이 웨어러블 캠을 부착하고 근무하고 있다. 블루투스 장치처럼 목에 둘러져 있는게 웨어러블 캠이다. 촬영중 이라는 명찰이 눈에 띈다. 사진 경북 의성군

악성 민원인의 난동이 날로 험악해지면서 각 지자체가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욕설이나 책상 등을 걷어차는 수준을 넘어 성희롱에 흉기 던지기, '액체테러' 사례까지 발생해서다.

경북 의성군은 4일 “악성 민원인으로부터 직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달 1일부터 공무원 몸에 부착하는 '웨어러블 캠'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무선 캠을 목에 착용한 후 '촬영중'이라는 명찰을 달아 악성 민원인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장치다.

블루투스처럼 목에 두르는 방식인 웨어러블 캠은 차량용 블랙박스처럼 영상과 음성이 자동 저장돼 악성 민원인이 난동을 부릴 시 법적 증거 자료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의성군은 민원부서 등 32개 부서에 40여개의 캠을 우선 배치했으며, 향후 캠을 더 늘려나갈 방침이다. 경주시도 내년 초 웨어러블 캠을 본격 도입해 활용할 계획이다.

충북 청주시는 민원창구에서 일하는 공무원 보호를 위해 부서에 투명 아크릴 가림막을 설치했다. 대구 중구청은 모의훈련을 통해 악성 민원인에 대한 대처법을 익히고 있다. 악성 민원인이 난동을 부리는 상황을 가정해 공무원들이 비상벨을 눌러 경찰을 부르는 등 제압 상황을 연습하는 방식이다. 개인적으로 호신술 같은 운동을 배우는 공무원도 있다고 한다.

지난달 경북 포항시청 대중교통과에서 개인택시 감차 사업에 불만을 품은 60대 A씨가 액체를 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얼굴과 몸에 약품을 뒤집어 쓴 직원이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뉴스1

지난달 경북 포항시청 대중교통과에서 개인택시 감차 사업에 불만을 품은 60대 A씨가 액체를 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얼굴과 몸에 약품을 뒤집어 쓴 직원이 119구급대에 의해 병원으로 이송됐다. 뉴스1

이른바 '액체테러' 사건이 발생한 경북 포항시는 최근 보호장구 등을 갖춘 청원경찰을 청사 내에 보강하기로 했다. 특히 민원 업무가 많은 청사 1층과 2층에 청원경찰을 더 배치하고, 청사 출입통제시스템도 별도로 구축키로 했다. 포항시 관계자는 "민원부서엔 폐쇄회로TV(CCTV)를 추가로 설치하고 각종 악성 민원의 유형별 대응방법 등을 담은 ‘악성민원 대응매뉴얼’을 전문 기관 도움을 받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앞서 경기 용인시 등은 2018년부터 순차적으로 삼단봉과 스프레이 등 호신용품을 민원실에 비치해 놓은 상태다. 폭력적인 악성 민원인의 공무원 위협 행위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이중 용인시는 최근 읍·면·동 사무소와 시청 징수과 차량등록사업소 등 민원 창구가 있는 50곳에 비상벨까지 설치했다. 민원인의 폭언이 들려오면 녹음 버튼을 바로 눌러 채증할 수 있는 녹취 전자교환시스템도 갖췄다.

공무원 보호조례 명문화 움직임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청주시지부가 지난달 청주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무원 폭행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청주시지부가 지난달 청주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무원 폭행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공무원 보호 제도를 조례로 명문화하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전국 공무원노동조합은 지난 5월 ‘악성 민원에 대한 공무원 등의 보호 및 지원에 관한 조례’ 전국 표준안을 만들어 각 지부에 전달했다. 심리상담과 치유, 법률상담, 손해배상 소송 지원, 비상대응팀 신설, 안전시설 등을 규정했다.

이에 전북 임실군 공무원 노조는 지난 9월 전국 최초로 악성 민원 관련 조례를 신설했다. 보호 조례안을 대표 발의한 진남근 임실군의회 의장은 “군민에게 봉사하는 것은 공직자의 의무이자 소임이지만, 그렇다고 인권을 무시하고 정당한 공무 수행을 방해하는 행위가 있어서는 안된다”며 “이번 조례는 공직자로서의 최소한의 안전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흉기 집어 던지기…흉포해진 악성 민원

경기도 용인시청 민원실에 있는 호신봉과 호신용 스프레이. 사진 경기 용인시

경기도 용인시청 민원실에 있는 호신봉과 호신용 스프레이. 사진 경기 용인시

엄태석 서원대 복지행정학 교수는 “풀뿌리 지방자치 이후 선출직 단체장이 나오면서 ‘관존민비(官尊民卑)’로 불리던 공직자 우위 시대에서 행정업무도 친절이 강조되는 시대로 변했다”며 “이제라도 호칭이나 존댓말, 업무방해 행위 등을 규정한 매뉴얼을 제작해 주민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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