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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어쩌다 핵심 관료들이 줄사표 던지는 나라가 됐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현 정부 출범 후 산업부서만 61명 퇴직

당·청 무리한 정책에 무너진 공직사회

세종시 관가의 공직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핵심 부처로 손꼽히던 기획재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정부 이후 적폐 청산과 탈원전 관련 경제성 서류 조작으로 실무 공무원이 잇따라 구속됐던 산업통상자원부의 탈(脫)공직 바람이 거세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올해 9월까지 부이사관(3급)과 서기관(4급)급 공무원이 61명이나 퇴직했다. 평생직장 개념이 무너진 시대에 행정고시 출신 고위 공무원이라고 평생 공직에 몸담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근 주요 부처 관료들의 줄사표는 무너진 공직사회의 한 단면을 비춘다는 점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다. 이들 대부분은 조직에서 밀려나듯 떠난 게 아니라 소위 ‘에이스’로 꼽히던 핵심 인력들이라 후배 공무원의 동요도 심각하다. 실제로 행시(외교관 후보자 선발 포함)로 5급 공무원에 임용된 후 10년 안에 퇴사한 공무원 수는 2016년 3명에서 2020년엔 15명으로 매년 크게 늘고 있다. 취준생들의 공직 선호도는 사상 유례없이 높지만, 정작 공직사회에 발을 들인 후 맞닥뜨린 우울한 현실 앞에 ‘미래가 없다’고 판단해 미련 없이 조직을 떠나는 것이다.

한때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자긍심이 높았던 공직사회의 사기가 이처럼 급격하게 주저앉은 데는 우선 조직의 위상 하락 탓이 크다. ‘청와대 정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지금은 과거 정부에 비해 청와대와 여당의 입김이 세다. 소득주도 성장과 탈원전, 부동산 규제 등 굵직한 핵심 정책은 물론 전 국민 재난지원금 같은 개별 사안에 이르기까지 관련 부처의 전문적 의견은 묵살한 채 당·청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 일쑤였다. 공무원들은 과거처럼 국가에 필요한 정책을 주도적으로 입안하기보다 청와대의 정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 자료를 억지로 만들어내거나 사후에 성과를 홍보하는 역할을 주로 해왔다. 공무원들 사이에서 스스로를 ‘BH(청와대)의 연필’이라고 칭하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다.

조직 내부의 실망감도 한 요인이다. 공무원을 “개혁 저항세력”이라며 압박하는 현 정부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꼭 필요할 때조차 제 목소리를 내지 않고 보신에만 더 신경 쓰는 최고위급 관료 선배들을 보면서 자괴감을 느낀다는 젊은 공무원이 많다. 청와대 의중에 반하는 보고서를 올린 공무원에게 “너 죽을래?”라고 발언했던 백운규 전 산자부 장관처럼 적잖은 장·차관들은 청와대의 무리한 요구에 맞서 부처 입장을 설득하고 조율하기보다 오히려 부당한 업무 지시를 내리곤 했다. 그 결과 책임지고 감옥에 간 건 실무 공무원이었다. 이래서야 공무원들이 사명감은커녕 법이 보장한 직업 안정성조차 누리기 어렵다. 정권과 상관 없이 공무원이 본분을 지키기 위해선 무너진 공직사회를 추스르고, 공직자가 소신대로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급선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