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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생 살았는지 죽음은 말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60호 21면

남아 있는 모든 것

남아 있는 모든 것

남아 있는 모든 것
수 블랙 지음
김소정 옮김
밤의책

1999년 6월의 어느 날, 해부학자이자 법의(法醫)인류학자인 수 블랙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상대는 글래스고대학교 영국의학위원회 법의병리학자 피터 바네지스 교수였다. 바네지스는 그에게 주말에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식사 제안 정도로 예상한 그는 계획이 없다고 대답했다. 바네지스는 그에게 코소보 행을 제안했다. 당시는 1998년 3월 발발한 코소보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 블랙이 파견된 곳은 코소보 프리즈렌 인근 빌리카크루사 마을. 이 마을은 끔찍한 전쟁 범죄의 현장이었다.

1998년 3월 26일, 세르비아 특수경찰대가 마을을 급습했다. 경찰대는 40여명의 마을 남자들을 버려진 건물에 몰아넣고 자동소총으로 몰살시켰다. 이어 건물에 불을 질렀다. 놀랍게도 살아남은 한 명이 전쟁 직후 이 범죄를 증언했다. 블랙은 범죄 현장에서 훼손된 시신을 조사했다. 희생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범죄에 사용된 탄피 등을 수거했다.

블랙의 코소보 행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듬해 그는 또 다른 범죄 현장을 찾았다. 코소보 전쟁 막판인 1999년 3월, 한 코소보인 가족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숨어있던 곳을 나왔다. 아버지는 트랙터를 몰았고, 나머지 가족 11명은 연결된 트레일러에 타고 있었다. 11명은 할머니와 어머니, 고모, 그리고 8명의 어린 자녀였다. 세르비아군이 발사한 박격포가 일가족을 덮쳤다. 트레일러에 타고 있던 가족은 모두 숨졌다. 아버지 역시 심하게 다쳤지만, 어렵게 가족 시신을 수습해 한 곳에 묻고 표시를 남겼다.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와 전쟁 범죄를 고발했다.

법의학자들이 사망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지문 채취 훈련을 하는 모습. [사진 밤의책]

법의학자들이 사망자의 신원 확인을 위해 지문 채취 훈련을 하는 모습. [사진 밤의책]

블랙은 훼손된 유해를 조사해 가족 일원별로 분류한 뒤 증거 목록을 만들고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처럼 조사하고 정리한 증거들은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 등 전쟁범죄자 재판에 제출됐다. (밀로셰비치는 재판 중이던 2006년 감옥에서 자연사했다.)

블랙이 2018년 쓴 이 책(원제 『All that remains』)은 죽음과 법의학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법의학’이라고 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접했어도 우리 삶과는 다소 유리된 느낌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포렌식(forensic)’은 어떤가. 당장 휴대전화로 눈이 가지 않는가. 포렌식이 법의학이다. 미국 드라마 ‘CSI’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등의 단어가 연상시키는 법의학은 그중에서도 주로 ‘법의병리학(forensic pathology)’이다.

앞서 소개했듯 저자는 ‘법의인류학(forensic anthropology)’을 전공한 학자다. 저자 설명에 따르면 법의병리학자 역할은 죽음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고, 법의인류학자 역할은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규명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찌 보면 그의 작업은 뼛조각 하나로 인간 진화를 설명하는 인류학의 연구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10대 시절 정육점에서 아르바이트했다는 저자는 그곳이 미래의 해부학자이자 법의인류학자의 훈련 장소였다고 소개한다. 그는 첫 해부 실습 경험에서 시작해 자신이 접했던 다양한 죽음에 관해 들려준다. 그의 이야기는 죽음의 과학적, 인류학적 설명에서 끝나지 않는다. 책 곳곳에서 죽음의 철학적 고민이 묻어난다. 늘 죽음과 함께하는 그로서는 필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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