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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먹통, 아직도 못 고친 외양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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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염태정 기자 중앙일보
염태정 경제에디터

염태정 경제에디터

서울 광화문 지하에는 대형 통신구가 있다. 15년 전쯤에 한 번 가 본 적이 있다. KT 사옥 지하와 연결된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름 50~60cm가량의 검은색 케이블이 층층이 쌓여 길게 뻗어있다. 흐릿한 불빛 아래 케이블을 따라 걷다 보면 영화 속 세상에 들어선 거 같았다. 당시 안내를 해주던 KT 직원이 광화문 통신구는 국내에서 가장 중요한 통신 시설 중 하나로 사고가 나면 나라가 멈출 수도 있다는 얘기를 해주던 기억이 난다.

광화문 지하의 커다란 통신케이블처럼 생활이 편리해질수록 이를 위한 인프라가 더 많이 필요하다. 관리도 만만치 않다. 통신망은 특히 더 그렇다. 사고가 나면 영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통신사와 정부는 통신시설을 A~D등급으로 나눠 관리한다. A등급은 피해가 발생하면 수도권·영남권 등 권역 단위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중요한 시설이다. B등급은 특별시·광역시·도 단위, C등급은 3개 이상의 시·군·구에 영향을 미치는 곳이다. D등급은 A~C급이 아닌 시설인데 대체로 단일 시·군·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설이다.

아현 사고 때 나온 통신재난대책
이번 먹통 사태엔 작동 안 돼
재난 안내문자·방송도 없고
정부는 책임 회피성 해명 급급

KT 먹통 사태는 통신 사고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그대로 보여줬다. 카드결제와 원격수업은 멈췄고 증권거래는 중단됐다. 온라인으로 진행되던 세계바둑대회는 연기됐다. 점심 장사를 망친 상인도 상당수다. 심리적 불안도 컸다. KT 가입자는 이동통신 1750만명, 초고속인터넷 940만명, 시내전화 1002만명. 인터넷 전화 317만명, IPTV 900만명 등 중복포함 4900만명에 달한다. 구현모 KT 대표가 사과문을 내고 피해 보상을 약속했지만,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알맹이 없는 보상 약속이라며 분통을 터뜨리는 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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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24일 KT 아현지사 통신구 화재로 서울·경기 고양시 일대에 통신 장애가 났다. 전화·인터넷·카드결제시스템이 먹통이 됐다. 아현지사는 D등급의 시설이었는데도 피해는 컸다. 사고 한 달 후인 그해 12월 27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통신망 재난 방지 및 통신망 안정성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통신구 소화설비 구축, 통신시설 점검 강화, 통신 우회경로 확보 의무화, 통신재난 발생 시 통신사 간 무선통신망 공동이용(로밍) 등이었다. 이를 위해 관련법도 개정됐고 통신·재난 전문가로 구성된 ‘정보통신 재난관리 심의위원회’도 만들어졌다.

이번 KT 먹통 사태에 아현지사 사태를 계기로 만들었던 대책은 작동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선통신망 공동이용이 없었다. ‘로밍이 왜 없었느냐’는 질문에 임혜숙 과기부 장관은 “당시 재난 로밍 서비스는 네트워크 엣지 부분에서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대책이었고, 이번엔 KT 라우터 경로설정 오류가 코어 네트워크까지 번지는 바람에 대책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말이 어려운데 요지는 아현지사 당시 만들었던 대책이 이번 같은 경우엔 적용 안 된다는 거다. 통신망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철저히 관리해 국민불편을 최소화하겠다며 내놓은 대책이 그저 미봉책이었다는 고백에 다름없다.

재난문자 알림이나 재난안내 방송도 없었다. 어느 건물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나왔으니 검사받으라는 문자가 수시로 날라오는 세상인데 아무런 안내가 없었다. 과기부는 먹통 사태가 발생한 지 30분가량 돼서야 정보통신사고 위기경보 4단계(관심-주의-경계-심각) 중 ‘주의’단계를 발령하는 데 그쳤다. 과기부는 “당시 디도스(악성코드를 이용한 서비스 거부) 공격이라고 해서 2단계 발령 후 사고가 나면 격상을 검토하기로 했다”고 한다. 행정안전부와 협의해 문자도 발송할 수 있었는데 복구가 시작됐다고 해서 발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철저한 원인 규명·보상과 함께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재난 안전, 특히 사이버 재난 안전 시스템 전반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전국적으로 ‘2021년 국가안전대진단’이 진행 중이다. 중앙·지방 정부가 함께 사고 위험이 있는 2만 3000개소를 선정하여 합동 점검을 하고 있다. 국가안전대진단은 물리적 공간 중심인데 앞으로 디지털 공간과 시설에 대한 점검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사이버 안보 대응 능력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우리 일상과 경제활동이 블랙 아웃을 겪는 것은 절대 가볍지 않은 일”이라고 했다. 국회는 재발 방지를 위한 현장점검에 나선다. 맞는 말이고 필요한 일이다. 정부는 변명하는 듯한 해명만 내놓을 게 아니라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놔야 한다. 소를 잃고 외양간을 못 고쳤지만 그래도 다시 외양간 고치기에 나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