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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홍남기 부총리, 직을 걸 때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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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조민근 기자 중앙일보 경제산업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조민근 경제산업부디렉터

“로마까지 와서 그 얘기를….”

곤혹스럽기도 하고, 이 무슨 악연인가 싶기도 했을 것이다. 지난달 30일(현지시각)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열린 이탈리아 로마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홍남기 경제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시종 말을 아꼈다. 전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꺼내 든 전 국민 재난지원금 추가 지급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이 자리에서 답변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피해 나갔다.

이재명발 ‘재난지원금’ 돌출
‘기재부 해체론’ 압박 더해져
침묵한다고 피해갈 수 없어
존재 이유 스스로 입증해야

하지만 다음날 이 후보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갔다. 전 국민에 1인당 최대 50만원을 추가로 지급해야 한다며 구체적 액수까지 거론했다. 이어 1일 캠프 관계자는 현재 국회에 올라가 있는 내년 예산안에 반영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남기라는 벽의) 돌파를 시도하겠다”면서다. 이쯤 되면 홍 부총리도 입장 표명을 마냥 피하긴 어렵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2차 재난지원금이 나간 지 고작 한 달여가 지났다. 소상공인에 대한 손실보상금도 이제 막 지급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추가 지원을 논의하겠다는 건 여당도 겸연쩍어할 일이다. 이 후보는 미국·일본보다 지원금 규모가 적다는 걸 추가 지급의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이들 나라에 비해 코로나19 피해는 적었고, 회복은 빨랐다고 자평한 게 다름 아닌 정부와 여당이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이처럼 논란이 큰 일을 밀어붙이는 이유는 뭘까. 정치권에선 ‘대장동의 덫’에서 벗어나려는 일종의 ‘시선 돌리기’ 전술이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여기에 관가에선 또 다른 해석도 내놓는다. 경제부처 한 고위 관료는 이를 “공식적으로 여당 대통령 후보가 된 만큼 자신이 정책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자, 관료의 기도 확실히 꺾어놓겠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차별화를 하겠다고 당장 청와대를 겨냥할 수 없으니 부처 맏형격인 기재부, 그리고 홍남기 부총리를 타깃으로 삼은 것이란 해석이다. 게다가 재정 관료들은 속성상 이 후보의 핵심 공약인 기본소득에 가장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이다. 이미 경기지사 시절부터 여러 차례 각을 세우기도 했다.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며 재난지원금의 전 국민 지급을 주장했고, 88% 지급이 결정된 뒤에도 보란 듯이 도(道) 예산으로 경기도민 100%에 지원금을 나눠줬다. 지역 화폐, 광역버스 예산 문제를 놓고도 충돌을 거듭했다. 기재부를 향해 “지나치게 오만하고 강압적”이라며 날을 세웠고, 홍 부총리를 두고는 “경제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질타했다.

이 후보 측은  ‘기재부 해체론’이란 채찍도 꺼내 들었다. 지난달 27일 싱크탱크 ‘성공포럼’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통제론을 제기하며 검찰·감사원과 함께 기재부를 도마 위에 올렸다. 핵심 권한인 예산권을 떼어내 총리가 관할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관료들이 가장 예민하게 여기는 권한과 자리를 건드린 것이다. 세종의 관가가 일손을 놓은 채 술렁대고 있는 연유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홍 부총리가 왜 기자들의 질문을 피해갔는지 이해는 간다. 하지만 이처럼 곤혹스러운 상황까지 몰리게 된 데는 지금처럼 말해야 할 때 침묵한 탓이 크다. 헌법은 예산안 편성권을 정부에 부여하고(54조), 국회가 정부의 동의 없이 예산을 증액할 수 없도록(57조) 못 박아 놨다. ‘예산 민주주의’를 저해한다는 비판도 있지만, 정치권의 각종 선심성 요구로 예산이 누더기가 되지 않도록 견제하는 역할이 작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경제팀은 그보다는 어정쩡한 타협으로 “밀면 밀린다”는 인상을 심어주며 신뢰를 깎아 먹는 일을 반복했다. 단순히 늘어난 나랏빚 규모만 문제가 아니다. 무리해서라도 재정을 써야 할 상황이라면 그 이상이라고 왜 못쓰겠나. 문제는 원칙의 부재다. 앞선 재난지원금 논의 과정에서도 밀리고 밀린 끝에 ‘소득 하위 88%’라는 누구도 납득 못 할 기준을 내놓고도 “선별 지원을 지켰다”는 자평을 한 게 경제팀이었다.

정권 말에다 안팎 경제 여건도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홍 부총리와 기재부가 더는 외풍에 흔들리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기재부 장관을 부총리로 예우하고, ‘경제 컨트롤타워’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붙여줘야 할 이유를 스스로 입증해주길 바란다. 침묵하는 대신 직을 걸고 원칙을 말하고, 눈앞의 표를 쫓는 정치권을 설득하고, 흔들리는 관료들을 다잡아 달라는 얘기다. 이미 최장수 경제 부총리 재임의 영예까지 얻은 마당에, 그리고 더 후퇴할 곳도 없는 마당에 좌고우면할 일이 뭐가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