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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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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오징어 게임’이나 김치, 장진호 등을 대하는 중국의 태도를 보면 중국은 아직 제국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지금 중국에서 영화 ‘장진호’가 대흥행이라는 건 그런가보다 싶은데 주북 중국대사 일행이 23일 함경도의 장진호 전투비 현장을 찾아 ‘항미원조 정신’을 외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첨가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 같은 대국이 민족주의를 내건 자체가 난센스다.

제국의 조건은 두 가지다. 먼저 제국에 걸맞은 광대한 영토와 인구라는 물적 기반이 기본이다. 두 번째, 대국을 유지하기 위한 내적 통합력이 필수적이다. 당연히 가지각색 민족과 인종, 종교와 문화에서 최대공약수를 찾아내려 하는 통합적 인식과 갈등 해결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민족·인종 앞세우면 실패
일본·독일 패망이 그 사례
한족 중심주의 세계관으로
민족국가론 제국 지탱 못해

그런데 후자인 내적 통합력 없이 민족·인종의 우월성을 내걸어 제국을 꿈꾸는 게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독일과 일본이다. 아리안의 피에서 우월성을 찾으며 인종주의·전체주의로 치달았던 제3제국 나치는 인류가 공인한 악의 제국으로 파멸했다. 일본은 각성한 엘리트와 이에 순응하는 민중의 콜라보를 통해 최고의 비용 대비 효과로 근대 국가에 진입했지만 이들에 인식 속엔 일본어와 가장 닮은 한국어의 존재조차 인정할 수 없었다. ‘아시아 유일의 깨어있는 나라 일본’이라는 극단적 우월주의는 다시는 없어야 할 원폭 두 발과 도쿄 불바다를 거친 뒤 잿더미로 끝났다. 독일과 일본은 제국을 꿈꾸면서 확장된 종족 국가를 만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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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과거처럼 전쟁과 무력으로 타국을 강제로 종속시키는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고, 제국주의는 다시는 등장해선 안 되는 금기어다. 하지만 안으론 대국을 유지하면서 바깥으론 국제사회를 선도하는 ‘알파 네이션’을 21세기의 제국으로 정의한다면 중국은 일단 물적 기반이라는 조건을 충족한다. 영토와 인구, 즉 생산력에서 중국은 막강하다. 시뮬레이션 PC 게임을 해본 청소년들은 잘 안다. 전략과 전술을 아무리 잘 구사해도 물량엔 당하지 못한다.

그런데 물량 만으론 알파국의 지위가 유지되지 않는다. 내치 역시 중요하다.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민족, 인종, 분파, 지역을 하나로 묶어 통일된 체제를 유지하는 게 제국의 최우선 과제다.

‘대국 알파국=제국’으로 정의한다면 제국에 가장 근접한 건 미국이다. 미국의 슬로건이 아메리칸 드림이다. 이곳에선 누구도 출신과 귀천에 관계없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꿈을 이룰 수 있으니 너와 나의 차이 정도쯤은 인정할 수 있다. 시리아인 이민자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이도 미국에선 IT 제국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아메리칸 드림이다. 애플 제국을 일군 스티브 잡스의 생부 이름은 압둘파타 존 잔달리다. ‘꿈이 이뤄지는 나라’가 미국을 하나로 묶는 기제 중 하나다.

그런데 미국에 버금가는 또 다른 제국이 될 수 있는 중국은 차이니즘으로 무장해 태양이 되려 하고 있다. ‘중국몽’ ‘중화민족’이라며 한족 중심주의 세계관으로 제국을 꿈꾼다. 하지만 민족으로 제국을 지탱할 수는 없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천상천하 유일중국’의 출발점을 만들어준 건 중화 우월주의가 아니라 사해동포주의였다. 프롤레타리아 사해동포주의다. 역대 중국 통일 왕조의 최대 고민은 내란과 내분이었다. 통일 중국을 위협할 외부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던 반면 내부의 반란과 역모는 상수처럼 계속됐다. 대국 중국의 근본 모순은 민족·지역·인종 간 갈등과 지배층·피지배층의 분열이었고, 이를 단기간에 지워버린 게 공산주의다. 종횡으로 갈라졌던 중국 안의 갈등을 인민 독재라는 사포로 갈아 표면의 틈을 없애 버렸다. 봉건 중국을 해체한 정치적·사회적 도구는 삼강오륜도, 동도서기도 아닌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중국 역사에서 공자, 맹자는 있었어도 ‘맑자’는 없었다.

중국 바깥에서 중국 발전의 틀을 찾았던 중국이 이젠 중화로 회귀하고 있다. 반봉건과 국가 통합에 사용했던 공산주의라는 외투가 커진 몸집에 맞지 않자 과거로 돌아가 중화 민족주의에서 해법을 찾으려 하고 있다. 6·25전쟁을 미국에 대항하는 항미원조 전쟁으로 규정해 왔던 중국이 이젠 항미원조에 ‘중화 부흥’을 새롭게 얹고 있는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제국을 추구하는 나라가 다양성과 보편타당성을 무시하고 종족 국가처럼 움직이면 내치가 흔들리고 바깥도 어지러워진다. 지금 우리는 외피는 제국, 내피는 한족 국가의 등장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