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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유홍림의 퍼스펙티브

타성에 젖은 한국 대학 일깨우는 미네르바 대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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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대학 교육의 미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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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후 내 딸은 대학에 갈까?” 미국의 교육 정책 전문가 케빈 캐리가 2015년 저서 『대학의 미래』에서 던진 질문이다. ‘우리가 알던 대학의 종말’은 예견된 미래인가. 연구, 실용 교육, 인문 교육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모두 쫓으며, 재정과 조직 확장을 통해 19세기부터 유지돼온 통합형 대학 모델의 영광은 머지않아 사라질 수도 있다.

현재까지 대다수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통합을 넘어, 병원과 부설학교, 평생 및 재교육 프로그램, 산학 협력 조직, 벤처창업 지원 서비스 등을 골고루 갖춘 ‘사회서비스 기지(Social Service Station)’로 진화해왔다. 그런데 급변하는 사회 환경과 인구 절벽, 온라인 학습플랫폼에 맞서서 그동안의 성취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한국 대학의 관료화·무기력은 국가경쟁력에 치명적
학과 중심의 경직적 운영으론 미래 인재 양성 못해
미네르바대 교수는 능동적인 학습 돕는 협력자 역할
학생은 세계 7개 지역서 살며 문제 해결 능력 키워

파괴적 혁신은 이미 시작돼

대학의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분야별로 의견이 다양하지만, 점점 더 중요해지는 대학 혁신의 과제는 교육이다. 앞당겨진 미래를 대비해야 하는 국내 대학들은 온라인 수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학업 만족도와 성취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변화까지 가야 할 길이 멀다. 공개와 경쟁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교수 평가 기준이 연구 중심적이며, 변화를 제한하는 관료제적 규제와 관성도 강하다.

서울대의 경우 혁신의 방향을 ‘융합’에 두고 있다. 융합 교육을 활성화하기 위해 다전공제도를 확대하고, 협업적 팀티칭과 마이크로 전공 등 학과와 단과대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융합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그러나 학과 중심의 경직성은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미국 대학들은 특유의 다양성·유연성·역동성을 기반으로 경쟁과 혁신을 통해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온라인 강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혼합형 학습은 교육 비용 절감, 교육 성과 개선, 교육 기회 확대에 기여하며, 인공지능 기반 교육은 개인별 맞춤형 학습 환경을 구축할 것이다. 고등교육 시장에서 파괴적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대중 온라인 공개강좌(MOOC) 플랫폼은 지난 100여년간 고등교육을 지배해온 통합형 대학의 타성과 관료주의적 장벽을 허물고 있다.

4조6000억 달러로 추정되는 글로벌 교육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은 벌써 치열하다. 여러 벤처기업은 시장 전체를 지배할 디지털 교육 플랫폼을 구축하고 있다. 하버드대와 MIT가 ‘어디서나 닿을 수 있는 대학(University of Everywhere)’ 구축을 위해 만든 에드엑스(edX)는 세계 160여 개 대학과 협력하여 3000여 개의 강좌를 온라인으로 제공한다. 스탠퍼드대를 거점으로 한 코세라(Coursera)는 200여 개 대학과 기업이 협업해 4300여 개 강좌를 개설했다. 최고의 대학이 제공하는 온라인 학위과정 강좌가 파격적인 가격으로 제공되며, 정보기술이나 데이터과학 등의 새로운 분야에 진출할 수 있는 통로도 열어준다.

고등교육의 실험장 미네르바 대학

기존 대학교육에 실망하고 새로운 대학을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지녔던 벤처투자자 벤 넬슨이 2013년 설립한 미네르바 스쿨이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올해 6월 미네르바 대학(Minerva University)으로 공식 인가됐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비판적 지성의 함양’을 목표로 하는 미네르바 대학은 고등교육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누가·무엇을·어떻게·어디에서·누구에게 가르치는가의 문제에 미네르바는 기존 대학과 다르게 접근한다. 과학적 연구 결과와 최신 디지털 기술을 토대로 설계된 ‘완전히 능동적인 학습(Fully Active Learning)’ 방식을 적용하여 비판적 사고력,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효과적인 소통과 협업 능력을 키우려 한다.

학생 선발과 교과과정에서 미네르바의 차별성은 분명하다. 다양한 국적과 소득, 관심사, 배경을 갖는 학생들은 첫해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기본소양 수업을 받는다. 2학년부터는 학기마다 세계 6개 도시를 순회하며 기숙사 생활과 다양한 문화를 체험한다. 이 시기에 예술과 인문학, 컴퓨터 과학, 자연과학, 사회과학, 경영 등 5개의 전공 관련 수업을 들으며, 지역 기반 과제를 수행한다.

또 미네르바는 협력 기업과 단체 네트워크를 활용해 학생들이 산학협력 및 공공 프로젝트를 수행하도록 지원한다. 3학년부터는 심화 학습을 수행하며, 자신의 학습 내용과 문제의식을 종합하는 캡스톤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4학년에 완성한다.

치밀하게 설계된 ‘포럼’ 수업

미네르바 대학의 최대 강점은 수업과 실제 경험을 결합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행한다는 점이다. 모든 교과과정과 학습 활동은 전문가들에 의해 치밀하게 설계된 결과물이다. 빠르게 도태되는 특정 분야의 지식보다 사고방식과 문제 해결 방법을 중요시하는 기본소양 과정은 비판적 사고방식과 효과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기 위한 필수교과목들로 구성돼 있다.

미네르바는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진부한 과목들은 개설하지 않는다. 교과서적 지식을 수동적으로 배우기보다 기초적 개념과 생각하는 방식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체 개발한 온라인 수업 플랫폼 ‘포럼’은 수준별 맞춤 학습, 완전히 능동적인 학습, 체계적인 피드백의 교육 방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고안됐다. 학생은 수업 전에 많은 과제를 준비해야 하며, 20명 미만의 소규모 세미나 수업에서 교수와 학생은 퀴즈와 토론을 통해 실시간으로 의견을 교환한다.

교육에 전념하는 미네르바의 교수는 일방적 강의자가 아닌 능동적 학습을 도와주는 ‘협력자(facilitator)’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학기 내내 과제 수행과 평가가 이루어지며, 교수와 학생 간 지속적인 피드백이 이어진다. ‘포럼’을 통해 학생과 교수는 높은 유대감을 형성한다.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지만, 학생들은 4년간 세계 7개 지역에 위치한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며 일반 대학 학생들보다 더 친밀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미네르바는 온라인 교육기관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치밀하게 설계된 오프라인과 온라인 복합 교육기관이다.

성적보다 학업 동기·잠재력 주목

한국의 고등교육 체제는 목적 구성이 모호하고, 대학의 자율성과 책무성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기반도 마련돼 있지 못하다. 또 고등교육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근본적인 인식 전환과 재정 투자 확대도 절실하다. 대학의 관료화와 무기력은 국가경쟁력을 살리기 위해 시급히 극복해야 할 문제다.

세계경제포럼(WEF) 보고서 ‘교육의 새로운 비전’은 언어와 수리, 과학, 디지털 정보처리 능력, 다양한 사회문화에 대한 이해력을 아우르는 기본적 문해력과 함께 비판적 사고력, 문제 해결 능력, 창의성, 소통과 협업 능력을 미래 인재의 역량으로 제시한다. 아울러 호기심과 자기 주도적 태도, 인내심과 적응력, 리더십과 사회의식 등의 자질을 함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과연 이러한 역량과 자질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한가.

한국의 대학 교육은 아직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미래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한계를 보인다. 미네르바의 실험은 진행 중이지만, 한국의 교육 혁신에 도움을 주는 새로운 교육모델이다. 국내 통합형 대학도 교과과정과 수업방식의 혁신을 통해 미네르바가 시도하는 교육 혁명에 동참할 수 있다. 최근 개발된 ‘포럼 2.0’은 수백 명까지 동시 접속이 가능한 학습 플랫폼으로 미네르바가 자체의 교육혁신 모델을 확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제 누가·무엇을·어떻게·어디에서·누구에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미네르바의 지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실천해볼 때다. 대학 교육의 활력을 살리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춘 교수가, 전공으로 나뉜 지식이 아닌 생각하는 방식과 문제 해결 능력을, 일방적 강의가 아닌 치밀하게 설계된 능동적 학습 플랫폼을 통해, 익숙한 공간이 아닌 새로운 학업 환경에서, 기존의 학업 성취도보다는 강한 동기 부여와 잠재력을 기준으로 선발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이 확산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