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훈범의 퍼스펙티브

포퓰리스트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중앙일보

입력 2021.10.21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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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베르사유의 고민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프랑스에서 서너 명의 닮은꼴 아이들이 줄줄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다면 옆 사람과 내기를 해도 좋다. 그들은 베르사유에 산다. 미니밴에서 네댓 명(때론 대여섯 명)이 우르르 내린다면 더 볼 것도 없다. 열이면 열, 베르사유 사람이다.”

15년 전 칼럼에서 썼던 내용인데, 그때보단 떨어질지 몰라도 여전히 승률 높은 내기가 될 거라 나는 믿는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20㎞ 떨어진 인구 9만 명의 베르사유는 지극히 보수적인 도시다. 부르주아와 가톨릭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옛 귀족의 후손들이 주로 모여 산다. 이들은 콧대가 높다. 태양왕 루이 14세 때 세계 정치·외교·문화의 중심지에 산다는 자부심이다. 그들에게 아이를 갖는 것은 자랑스러운 가문을 빛내는 후손의 의무이기도 하다.

극우 경계하던 보수의 텃밭
극우인사의 책 사인회 성황
정부 실패가 위험에 빠뜨려
내년 차기 정부, 교훈 삼아야

베르사유 주민들은 여전히 권력과 가까이 있다. 오랫동안 총리 별장으로 쓰이던 베르사유의 ‘랑테른’ 사냥 별장을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총리한테서 빼앗아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르코지는 거기에 자주 머물며 ‘We are the world’라 쓰인 티셔츠를 입고 조깅을 했다고 한다. 지금도 베르사유 주민들은 루이 14세의 옛 동물원 부지 주변에서 자전거를 타는 퍼스트레이디 브리지트 마크롱을 볼 수 있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도 그 별장을 이용했지만, 베르사유 주민들은 보수 쪽 대통령한테 좀 더 친근함을 느낀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보수화에 반대하며 2018년 ‘노란 조끼’의 물결이 프랑스 전역을 휩쓸 때도 베르사유는 노란색이 눈에 띄지 않는 몇 안 되는 도시 중 하나였다. “2000년대에는 뇌이(파리 근교로 사르코지 지역구)가 프랑스 우파의 수도였지만, 이제 베르사유가 센 강 우안(부르주아 거주 밀집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고 르몽드는 전한다.

하지만 이들은 극우파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드러내 왔다. 지난 2017년 총선에서 공화당의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프랑수아 피용이 비리 의혹으로 낙마해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도 극우파 정당인 마린 르펜의 ‘국민연합(RN)’은 명함도 내밀지 못했다. 대신 마크롱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정당 ‘전진하는 공화국(REM)’ 소속 후보를 선택했다.

베르사유에 뜬 프랑스의 트럼프

프랑스 부르주아와 기독교 전통주의, 옛 귀족의 후손들이 모여 살며 보수의 품격을 지켜왔던 베르사유에서도 극우의 바람이 일고 있다. 사진은 베르사유 궁전. [중앙포토]

프랑스 부르주아와 기독교 전통주의, 옛 귀족의 후손들이 모여 살며 보수의 품격을 지켜왔던 베르사유에서도 극우의 바람이 일고 있다. 사진은 베르사유 궁전. [중앙포토]

그런데 그런 베르사유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에리크 제무르(63)의 모습이 베르사유에서 자주 비치고 있는 것이다. 알제리 태생의 유대인 이민 2세인 제무르는 “프랑스에서 200만명의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고 있는 인물이다. 2009년 보수 일간지 르피가로의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대부분의 (마약) 밀매자는 흑인과 아랍인”이라는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지만 이후에도 문제의 발언을 그치지 않아 두 차례나 기소됐다.

이후 그는 2014년 출간한 『프랑스의 자살』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익의 스타가 됐다. 이 책에서 제무르는 “68혁명의 가치가 만들어낸 이민자·동성애 문제가 프랑스를 망쳤다”는 도발적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좌파에 대한 감정적 비판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좌파의 치부를 조목조목 드러내 ‘품위 있는’ 극우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정치인으로 활동한 적이 없고 소속 정당도 없으며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았지만, 지난 6일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17%의 지지율을 기록해 마크롱 대통령(24%)에 이어 2위까지 치고 올라간 상태다.

제무르의 인기가 치솟자 프랑스 언론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보도하고 있다. 프랑스 미디어를 감시하는 시민단체인 ‘미디어비판행동(Acrimed)’에 따르면 지난 한 달 동안 TV에서 제무르에 관해 방송한 시간은 11시간이 넘는다. 경쟁자인 사회당의 안 이달고 파리시장의 2시간, 르펜 대표의 1시간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르몽드에서 발행하는 잡지인 ‘M’ 역시 최근호에서 베르사유에서 열린 제무르의 신간 『프랑스는 최종 답변을 하지 않았다』 사인회 소식을 전했다. 잡지는 “많은 베르사유 주민들이 사인받은 책을 얼른 가방에 숨기면서 사인회장을 떠난다”고 썼다.

극우파에 대한 경계의 시선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만큼 베르사유에서도 제무르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 대선에서 2위로 마크롱과 결선투표까지 갔던 마린 르펜 RN 대표보다 지적이며, 가톨릭 전통주의자들보다 더 가톨릭의 가치를 존중하는 제무르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사유 출신으로 2019년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공화당 1번 순위를 받을 정도로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프랑수아 사비에 벨라미 의원조차 “공화당이 왜 제무르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극우파 대통령 나올 수도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회 통합을 위해 프랑스에서 새로 태어나는 이민 가정 아기들에게 ‘무함마드’ 같은 성을 붙이는 걸 금지하고 가톨릭 식 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극단주의자에게 프랑스 같은 문명사회가 열광하는 이유가 무얼까.

우리는 그 답을 미국에서 이미 보았다. 이민 문제에 대한 강경한 대응과 과격한 발언으로 분열된 미디어 환경에서 주목받는 수법으로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됐다. 제무르가 트럼프와 다른 점이라면 “트럼프가 지식인을 경멸하고 반지식인 전쟁을 주도했다면, 제무르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적 포장이 필요한 프랑스에서 지적인 트럼프가 되길 원한다는 것”이라고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분석한다.

물론 주별 선거인단을 승자 독식하는 미국식 선거제도와는 달리,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결선투표를 치러야 하는 프랑스에서 제무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런 건 아니다. 2002년 대선 결선투표에서 극우파인 장마리 르펜 국민전선(FN) 대표가 17.8%를 득표한 반면, 2017년 결선투표에서는 그의 딸인 마린 르펜의 득표가 33.9%까지 올라갔다. 제무르는 아니더라도 그와 유사한 길을 걷는 어느 극우(또는 극좌) 후보가 엘리제궁에 입성할 날이 올 수 있다는 얘기다. 활황만 계속되는 경제가 있을 수 없고 이민 문제 역시 갈수록 복잡해지고 해결이 어려워질 게 분명한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다.

번잡함보다는 평온함, 역동적 성장보다는 옛 영화 추억하기를 선호하던 베르사유가 조금씩 바뀌고 있는 것도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이민 문제가 더 이상 파리 같은 대도시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현재 베르사유의 중심지는 땅값이 치솟아 평당 5000만원이 넘는 곳도 나오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대가족들과 귀족 후손들이 주변 지역으로 밀려나고 있는 형편이다. 부동산 가격 상승은 파리에서 베르사유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퀼로트(Sans-culotte 프랑스 대혁명 당시 주역이었던 무산 시민 계층)’에 점령된 파리에서 탈출하려는 부르주아들이 베르사유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1781년 파리 코뮌 때 파리 시 정부가 베르사유에 머물렀던 것처럼 말이다.

파리 코뮌이 ‘두 달 천하’로 끝난 뒤 130년간 우파의 아성으로 머물렀던 파리는 2001년 이후 사회당 소속 시장 두 사람이 줄곧 시장실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공공주택과 생태·환경 중시 정책 등 지속적인 좌파 정책으로 우파 지지자들을 화나게 만들어왔다. 특히 2001년부터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 밑에서 부시장을 하다 2014년 시장이 된 이달고는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뒤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추진하고 있다. 시내 전역에서 시속 30㎞ 자동차 속도 제한, 노상주차장 없애고 자전거 도로와 보도 확대, 초고층 개발 백지화와 도시숲 조성, 에어B&B를 매입해 공공임대주택 전환, 기존주택 매입해 사회주택 비율 25%로 확대….

급진적 정책이 부른 후유증

좌파 파리시장들이 파리를 사람을 위한 도시로 만들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전임 들라노에 시장은 세계 최초로 무인대여 자전거인 ‘벨리브(서울시의 따릉이)’를 도입하고, 센강 우안 강변도로를 보행자 전용 도로로 만드는 친환경 정책으로 한때 대선 후보로 급부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은 수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켜 오히려 행정 병목 현상을 초래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강변 보행자 전용도로는 행정소송이 이어져 2018년 행정재판소가 조례 취소를 판결한 바 있다.

더욱이 이달고 시장의 2기 공약들은 ‘모두의 파리(Paris en commun)’라는 이름과는 달리, 실현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급진적인 내용이 많다. 이달고 시장은 “성장과 효율이란 이유로 환경과 생태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공언하지만, 자칫 도시의 활력을 잃고 시민 간 갈등을 조장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미 그럴 조짐이 보이고 있다. 베르사유의 변화는 그 시작일 뿐이다. 아무리 이상적인 아이디어라도 현실이라는 토대 위에 서지 않는다면 이뤄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강행하다면 치러야 할 비용이 배보다 큰 배꼽이 될 수 있다.

멀리 프랑스의 문제가 남의 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기 때문이다. 전임 서울시장 때 사회주택이나 공공임대 등 파리에서 어깨너머로 본 정책들을 서울에 도입한 게 여럿이다. 그것 중 상당수는 신임 시장에 의해 부인되고 있다. 오세훈 시장은 시민단체 출신인 전임 박원순 시장의 무분별한 지원으로 “서울시가 시민단체의 ATM이 됐다”고까지 비판한다. 일부 반발도 나오고 있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무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프랑스의 문제가 단지 파리의 문제에서 비롯된 게 아니듯, 이민자 문제를 따지자면 제국주의 식민정책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듯, 우리의 문제 역시 중앙정부의 무능과 실책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부동산, 탈원전, 북핵 등 모든 문제가 현실을 무시한 과도한 이상주의에서 실패의 근원을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한 실패는 또한 전임 정부의 실패가 그 자리를 깔아 준 것이다. 실패한 정권은 바뀌는 게 당연하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하며 그런 변화 속에서 바른 방향을 찾아가는 게 국정이겠지만, 진폭이 지나치게 클 경우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하고 그것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몇 달 지나면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다. 그것이 어떤 정부든 이제는 무리한 정책의 후유증을 생각하고 시행에 앞서 반대자들을 설득해 갈등을 최소화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정권이 아니라 국민만 생각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런 정부의 출범을 기대하는 뜻에서 멀리 베르사유의 고민을 끌어다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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