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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장으로 읽는 책

유계영 『꼭대기의 수줍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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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꼭대기의 수줍음

꼭대기의 수줍음

강이 끝났다. 10년 전쯤이던가. 압구정과 옥수 사이 구간에서 느끼는 기분에 대해 친구가 말한 적이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공포에 대한 거던가. 물속에 가라앉는 부동감에 대한 거던가. 그에 대한 시를 써 오기도 했었다. 나는 강남에 있는 걔네 집만 곱씹었다. 1호선을 타는 나는 그런 거 모르니까, 하고 별 반응 안 했다. 우리가 이웃이 되는 일은 없겠지. 먹는 사람, 자는 사람 다 있는 이 지하철 한 량 안에서 같이 머무는 동안만 잠깐 이웃인 거지. 과거의 나는 늘 생각보다 더 한심했던 것 같다. 자세하게 살지 않은 탓이다.  유계영 『꼭대기의 수줍음』

“자세해져야 한다. 자세해져야만 보이는 게 있다”라고 작가는 썼다. 압구정과 옥수 사이 계층 문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서문에서도 “비가 올 땐 이 많은 새들이 다 어디로 가지? 콧속이 얼어붙는 겨울밤에는 그 많은 고양이가 다 어디에 숨지? 늘 그런 게 궁금했다. 늘 그런 것만 궁금했다”고 썼다.

독창적 상상력이 매력적인 산문집이다. 삶을 자세하게 들여다본 이의 구태의연하지 않은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의 매력은 무궁무진하지만 그중 제일은 자신의 혀를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유머 감각이다. 이 사실을 떠올리면 자못 유쾌해진다.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한 남자가 자신의 콧구멍 속에 손가락을 넣고 중요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한참 뒤적거리는 장면을 봤다. 소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헤매지 않았을 텐데. 인간의 무능을 확인할 때 가장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