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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프리즘] 다시 따져본 노벨문학상 공식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59호 31면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2주 전(10월 7일)에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발표한 스웨덴 한림원은 올해도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수상자를 예측하지 못하리라는 예상 말이다. 예상대로 예상 못 한 작가가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런데 올해 수상자로 선정된 탄자니아 난민 출신 작가 압둘라자크 구르나는 그런 예측 불가능성 정도에서도 역대급인 것 같다. 선정 사실을 통보하는 한림원 관계자의 전화를 판촉 전화(cold call)라고 여기고 “꺼지라(get off)”고까지 했다지 않은가. 작가 스스로도 자신의 노벨상 수상을 전혀 짐작조차 못 했다는 얘기다.

깜짝 선정 한림원 일관성 없어 보여
노벨상 없이 문학 사랑 태도 필요

작가뿐 아니다. 아마존은 구르나의 소설을 전자책으로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 한 문학출판사 편집자가 노벨상 발표 직후 찾아봤더니 없더란다. 부커상 최종심에 올라 주목받았던 1994년 장편소설 『Paradise』 이후 이렇다 하게 팔리거나 관심을 끌지 못하다 보니, 아무래도 젊은 독자층이 선호하는 전자책은 만들지 않았던 것 같다.

다시 한림원 얘기로 돌아가자. ‘깜짝 선정’은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올해 수상작 발표 직전 미국의 진보 성향 시사지 ‘더뉴리퍼블릭(TNR)’은 누가 유력한지 전망 기사를 내보냈다. 공교롭게도 이 기사의 부제가 한국의 문학 독자에게 복합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하루키는 아니다, 확실히(Not Haruki Murakami, that’s for sure)’였다. 지나치게 인기 있다는 이유에서다. 어쨌든 이 기사에서 한림원의 앤더스 올슨 사무총장은 자신들은 오로지 문학성(literary merit)만을 볼 뿐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 걸로 나온다.

싱거운 얘기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순진한 거다. 노벨문학상 선정이야말로 ‘오징어 게임’ 같은 확률 아닐까. ‘선정’을 ‘게임의 최종 승리’로 바꾼다면 말이다. 어쩌면 성격도 비슷하다. 내가 받으면 남이 못 받는다. 가령 아프리카 출신 구르나의 이번 수상으로, 대륙의 대표 작가처럼 노벨상 단골 후보로 거론됐던 케냐 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는 수상권에서 멀어졌다고 봐야 한다. 한림원이 큰 시차를 두지 않고 수년 내 아프리카 작가를 다시 선택하는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면 말이다. 최소한의 수준에서라도 특정 수상자 선택의 의미, 부수 결과에 대한 고려가 없을 수가 없다.

이제는 ‘국뽕’ 얘기를 해보자. 우리는 언제쯤 한국어를 쓰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갖게 될까. 깜짝 선정에 맛 들인 한림원에 어떤 일관성 있는 원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시야를 넓혀 외곽을 살피면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진다. 구르나는 알려진 대로 영국의 켄트대에서 자신의 소설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 포스트 식민주의 문학을 가르치다 은퇴했다. 그런데 켄트대는 2017년 수상자인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문학을 공부한 곳이다. 시기가 겹치지는 않지만 궤적이 겹친다. 더구나 두 사람은 영국의 RCW라는 같은 문학 에이전시 소속이다. 이 회사는 2018년 노벨상 수상자인 폴란드의 올가 토카르추크도 관리한다. 그림이 그려지시나. 기존 수상자의 추천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속설을 떠올리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희소식 하나. 한강도 RCW 소속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그들만의 리그’에 발 들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노벨상에 보장이라는 건 없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없으면 없을수록 수상 확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한강이든 누구든 언젠가는 받을 텐데 그때까지는 루쉰식 정신승리법이 정신 건강에 유익할 듯싶다. 그들만의 문학상일 뿐, 우리에게는 우리 문학이 훌륭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이렇게 마음먹는 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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