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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정책의 시간’을 기다리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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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지난 5월 ‘진보의 소주성 비판 일리 있다’는 칼럼을 썼다. 진보 경제학자들이 많이 참여한 서울사회경제연구소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를 소개했다. 진보나 보수라는 선입견 딱지를 떼고 보면 경제학자라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았다.

당시 토론회에서 발표한 학자들은 1980년대 중후반 학번들이 많았다. 본인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진보·개혁성향의 후학을 이끌었던 변형윤 서울사회경제연구소 명예이사장의 아호를 따 ‘학현(學峴)학파’로 불렸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했던 김상조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나 현 정부 초대 경제수석을 지낸 홍장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의 ‘학현’ 후배들인 셈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반성하자는
진보경제학자 정책 제언에 공감
보수·진보가 그리 멀리있지 않아

이들이 최근 ‘한국경제의 대전환과 다음 정부의 과제’라는 부제를 달아 『정책의 시간』이라는 책을 냈다. 11명의 경제학자(원승연·박민수·류덕현·우석진·홍석철·강창희·허석균·이상영·김정호·지만수·주병기)가 각각 총론부터 재정, 세제 개편, 건강보험, 교육, 부동산, 인구, 기후변화 등 각론까지 담았다. 풍부하게 사례를 넣어 쉽고 간결하게 썼다. 술술 잘 읽힌다. 책 뒤쪽을 보니, 여당 대통령 후보인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경선 후보로 뛰었던 이낙연·정세균 전 총리가 나란히 추천사를 썼다.

원승연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전 금융감독원 부원장)가 저자를 대표해 서문을 썼다. 책 출간의 계기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성”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 정부의 정책 실패를 이유로 진보적 경제정책 자체를 전면 부정하는 건 일부의 악의적 주장이라며 극히 경계했다. 정책 패러다임을 성장에서 평등과 공정으로 바꾸자는 게 핵심 주장이다. 불평등과 불공정을 바로잡겠다는 현 정부의 방향은 맞았지만 개혁을 유능하게 추진하지 못했다고 봤다.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정부의 어정쩡한 시장 개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2018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이 제안해 전국으로 확대된 제로페이, 지난 연말 이재명 지사가 시작한 경기도의 공공배달앱 ‘배달특급’이 그런 사례다. 제로페이는 카드 일일 사용액의 0.1%에 불과한 ‘이용률 제로’ 페이가 됐고, 배달특급 점유율은 1%가 안 된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생계형 적합업종)제도와 대형마트 영업규제도 소비자를 희생하면서 정작 소상공인의 자생력은 키우지도 못했다. 시장의 일과 정부의 일은 달라야 한다는 주장은 기존 보수의 입장과 별로 다르지 않다. “정부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와 서민을 보호하겠다고 함부로 시장에 간섭하지 마라. 대신 고용과 복지확대라는 정공법을 택하라. 교육·보육·교통·전력 등 필수 인프라는 섣부르게 민자 사업을 추진하지 말고 정부가 확실하게 책임지고 공급해야 한다.”(박민수 성균관대 교수)

부처 간 칸막이 행정 탓에 시대착오적인 평생 능력개발 행정을 펴고 있다는 비판도 신랄하다. 구직자에게는 연간 300만원까지, 재직자에겐 5년간 300만원까지 지원하는 정부의 내일배움카드를 활용해 직업능력을 개발하려는 사람이 민간학원에 등록하면 훈련비를 지원받지만 대학 교육과정에서 배우려면 자비를 내야 한다. 대학은 교육부 관할이어서 고용부의 내일배움카드를 쓸 수 없어서다. 시대착오적인 낡은 행정이다. 경직적인 교육재정 배분도 문제다. 초·중·고 학생 수는 줄어드는데 내국세의 정률(20.79%)로 정해진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늘어난다. 그 결과 초·중·고 학생의 1인당 연간 교육비가 대학생보다 많다. 선진국과 거꾸로다. (강창희 중앙대 교수)

보수가 중시하는 재정건전성이나 국가채무비율보다 국가채무의 성격, 만기 구조, 금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속가능한 재정이라는 관점으로 재정운용의 틀을 짜야 한다는 주장은 보수·진보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할 만한 주제다. 이재명 여당 후보의 기본소득보다 그 돈으로 기존 복지제도를 충분히 두텁게 하고 중산층과 청년세대에게 혜택을 크게 늘리는 게 효과적이라는 주장에는 보수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류덕현 중앙대 교수)

물론 총론에서 일자리 늘리는 경제 성장의 긍정적인 측면을 낮게 평가하고, 불평등 개선 의지의 부족을 부동산 정책 실패의 근본 원인으로 거론하며, 지나치게 관료를 불신하는 입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각론에서 제기된 다양한 분석과 정책 대안을 보며 정치적 슬로건만 떼어 내면 보수와 진보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대선 국면에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책 토론장이 어서 열리기를 바란다. 역시 보수, 진보가 아니라 유능, 무능이 더 중요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