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분수대

브래드버리 만들기

중앙일보

입력 2021.10.14 00:18

지면보기

종합 29면

장주영 기자 중앙일보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장주영 내셔널팀 기자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000m 우승 후보로 한국의 김동성과 중국의 리지아준 등이 꼽혔다. 하지만 엉뚱한 결과가 나왔다. 당시 29살이던 호주의 노장 스티븐 브래드버리가 금메달을 따냈다. 마지막 코너에서 1~3위로 달리던 선수들이 우르르 뒤엉켜 넘어지면서다. 브래드버리는 레이스 내내 꼴찌로 달렸지만, 이렇게 ‘어쩌다 금메달’을 따냈다.

최근 한국에서 브랜드버리가 소환됐다. 올림픽 쇼트트랙 대표선수인 심석희(24)가 2018년 평창올림픽 당시 대표팀의 한 코치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가 공개되면서다. 심석희는 최민정(23)·김아랑(26) 등 대표팀 동료를 비속어로 조롱했다. 특히 1000m 결승을 앞두고는 코치와 ‘하다 안되면 브래드버리를 만들자’고 대화한 부분이 논란이 됐다. 실제 경기에서 심석희는 최민정과 뒤엉켜 넘어졌고, 두 선수 모두 메달 사냥에 실패했다.

대화 내용이 알려진 후 심석희는 “브래드버리 선수를 언급하며 제가 의도적으로 넘어진 것처럼 서술한 부분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면서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한번 제기된 의혹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기세다. 무엇보다 의혹의 사실 여부에 따라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최민정 측의 반응이 심상찮다. 최민정 측은 소속사를 통해 “충돌사고의 고의성 여부를 철저히 밝혀달라”고 촉구했다.

브래드버리가 한국에서 자신이 연일 언급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좀 억울할 것 같다. 브래드버리는 꼼수나 속임수를 써서 금메달을 따지 않았다. 자신이 다른 선수보다 뒤처진다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느린 페이스대로 나아갔다. 그러다 앞선 선수들이 쓰러졌고, 멀쩡하게 결승선을 통과한 선수는 그가 유일했다. 은퇴 후 낸 자서전 제목이 『Last Man Standing』인 이유다.

‘브래드버리 만들기’란 표현은 어떤 의도로 쓰느냐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었다면, 경쟁자의 앞길을 막기 위한 추악한 음모일 수도 있다. 반면 재능이 부족해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의미로도 쓸 수 있을 것이다. 반칙과 꼼수가 판치는 혼탁한 세상이지만, 브래드버리들의 우직한 성공 스토리를 더 많이 들을 수 있기를….

Innovation Lab

ADVERTISEMENT